"정조의 효심과 개혁정신, 과학사상을 되살리자는 지역 원로와 향토 문화인의 복원 요구가 얼마나 거셌는지 몰라요."김준혁(金俊爀·37) 수원시 학예사는 부분적으로나마 복원을 완료, 개방을 앞두고 있는 화성행궁(華城行宮)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국보, 보물에 한참 못미치는 경기도기념물 65호에 불과하지만 정조의 채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외로운 궁궐생활을 감내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묵묵히 지켜보면서 속으로 피눈물을 삼켰다. 그 때문인지 정조는 즉위 후 경기 양주의 아버지 묘를 화성으로 옮기고 정약용으로 하여금 과학적 설계를 토대로 한 국내 최초의 신도시 화성을 건설케 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마다 기거하던 별궁으로 효행심과 왕권강화의 상징이자 토대였습니다."
하지만 인근 신풍초등학교 교무실로 사용된 낙남헌을 제외하고는, 화성행궁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됐다.
수원시가 그런 화성행궁의 복원에 나선 것은 1996년. 그리고 7년간의 공사 끝에 사라졌던 화성행궁 576칸(8만㎡)중 482칸을 최근 재현했다.
화성과 행궁 관련 연구 및 복원 자문 작업을 하고 있는 김 학예사는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 회갑연을 열기 위해 수백리 길을 달려왔고 백성들은 넙죽 엎드려 그의 행차를 반겼다"며 "정조는 쌀을 나눠주고 죽을 끓여 먹이면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행궁의 정문 신풍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왼쪽으로는 서리청 비장청 외정리소가 나란히 서있다. 좌익문과 중양문을 지나면 본체인 봉수당과 만난다. "1795년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거행하며 '만수무강(壽)을 받들어 빈다(奉)'는 뜻으로 봉수당이라 이름 지었답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 정조의 침소인 복내당보다 혜경궁 홍씨가 기거한 장락당이 왜 더 화려한지 이해가 간다.
복원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행궁의 뼈대를 이루는 적송(赤松) 구하기가 특히 어려웠다. 결국 강원도 태백까지 뛰어가 쭉쭉 잘 뻗은 적송을 골라왔다. 김 학예사는 "문헌만으로는 부족해 전문가 수십명으로부터 고증 자문을 얻었다"고 말했다.
수원시로서는 300억원의 사업비도 부담스러웠다. 도비 지원이 적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금낭비'라며 반발하는 주민이 있었다. 주민 박광운(36·팔달구 원천동)씨는 "처음에는 수원시가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러나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화성행궁을 바라 보면서 수원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일제에 의해 사라진 건물의 터에는 수원의료원, 경기여성회관, 수원 중부경찰서 등이 있었는데 행궁 복원을 위해 모두 철거했다. 수원시는 여관으로 사용하던 우화관 터의 신풍초등학교 마저 이전하고 2010년 복원작업을 완전 마무리할 계획이다.
행궁의 관리를 담당하는 수원시 행궁계장 이병기(李炳基)씨는 "행궁의 복원으로 문화도시, 역사도시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며 "화장실 등 편의시설 확충 공사를 마무리하고 4월중 완전 개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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