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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1> 그리스 로마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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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문화코드]<1> 그리스 로마 신화

입력
2003.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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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친구'의 흥행과 드라마 '야인시대'의 인기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폭력 드라마를 본 후 '명상'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오늘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문화 현상과 상품화한 문화 흐름을 8회에 걸쳐 짚어 본다.

식지 않은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

유치원생 아이를 키우는 주부 박모씨는 요즘 고민이 많다. 아이가 하루 종일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인터넷으로 편당 500원인 VOD 서비스로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을 보더니 색칠 공부와 만화책을 번갈아 보고 급기야 광고지에 소개된 가방을 사달라고 조른다. "헤르메스가 무슨 신인줄 아느냐" 등 수시로 퀴즈를 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불을 지핀 신화 열풍이 이제 한글을 갓 깨친 5, 6세 아이에게까지 번지며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해리 포터'(10권, 600만권)의 인기에 버금가는 열풍이다.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 오리온은 인간이구요, 이리스, 브리세이스, 이피게에이아… 미국에서도 맨날 이 책만 읽었어요." 지난해부터 미국에서 조기 유학 중인 한수연(8·LA 베벌리힐스 행콕파 초등학교)양은 방학을 맞아 서울을 방문한 닷새 동안 교보문고를 두 번이나 찾았다.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열성 팬. "신화가 '해리포터'보다 재미있어요. '꼬마 마법사 레미'요? 그건 유치하구요."

교보문고 어린이 서적 코너의 이선미 팀장은 "최근 인기 도서는 만화로 엮은 그리스 로마 신화류가 단연 으뜸"이라며 "신간이 나올 때는 주말 이틀간 500권의 책이 팔려 나가고, 전화예약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그리스 신화의 인기는 헬레니즘의 승리?

2000년 6월 이후 100만부 가까이 팔린 2권짜리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저자인 이윤기씨는 "신화는 양성, 동성애, 근친상간 등 제도에 대한 위반으로 가득하다. 인권이 신장하는 순간 신화는 수면 위로 떠올라 분출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이 전세계를 한 동네로 만들면서 대중이 서양문물의 근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신화 돌풍의 요인으로 꼽혔다. '만화로 보는…'을 출간한 가나출판사 이광진 대표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헬레니즘 문화의 산물이다. 신화는 인간 중심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신화 속의 신은 인간이 갖는 모든 욕망을 갖고 있다. 독자들이 신화에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카오스에서 땅의 신 가이아가 생겨나고 그가 아들 우라노스를 낳았다는 내용의 신화는 조물주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고, 그들이 인류의 조상이 됐다는 창조론의 논리적 구멍을 메울 수 있다. 신화의 인기는 헤브라이즘적 세계관이 헬레니즘적 세계관으로 대체되는 분위기를 보여 준다."

자극적인 내용이 어린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은 만화든 TV든 신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것이 아이들의 '지적'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해리포터의 인기는 아이를 TV 앞에서 끌어내 책을 읽히려는 부모들의 성원으로 이뤄졌다"는 미국 언론의 인기 분석은 우리의 신화 인기에도 유효한 듯하다.

거세된, 반쪽 짜리 신화의 문제

그러나 현재 60여권에 달하는 토머스 벌핀치(1796∼1867)의 '신들의 전성시대'(1955)에 주로 의존한 국내 신화의 열풍은 있는 그대로 반기기 어렵다는 지적도 곱씹을 만하다. 로마인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그리스의 신화 세계를 소개한 '그리스 신화의 세계'의 저자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언어인지과학과 교수는 "벌핀치의 저작은 치정, 근친상간, 살인 등의 핵심적 문제를 피해간 일종의 '프린스 텍스트(Prince Text)'로 '주홍글씨' 시대의 청교도적 가치관으로 신화의 원래 의미를 탈색했다"며 "벌핀치의 책으로 그리스 신화에 접근하는 것은 고려인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현대인의 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의 신화 바람을 상업주의와 떼어놓고 보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IT 산업의 근간은 결국 상상력이며 신화 교육을 강화하는 프랑스의 사례에서 보듯, 신화는 상상의 원천"이라는 유 교수가 그 샘물이 상업성으로 물드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결국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기는 '선생님'이 아니라 '이야기꾼'으로 다가 온 신화의 승리이자 한계일지도 모른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김지영기자 kimjy@hk.co.kr

어린이 신화열풍에 시장 "쑥쑥"

2000년 시작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인기는 성인용 도서가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답사 여행 상품으로 파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신화 시장은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원 소스 멀티 유즈'가 구현되는 시장 특성 상 꾸준히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SBS에서 방영 중인 '올림포스 가디언'은 완전히 '만들어진' 신화 상품이다. 발간 초기 광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가 크게 히트하자 지난해 상반기 가나에듀테인먼트와 SBSi 등 6개사가 46억원을 투자, 컨소시엄 형태로 TV용 창작 애니메이션 '올림포스 가디언'을 제작, 12월부터 방영했다. 14권까지 나온 만화책은 500만 권 가량 팔렸고, VOD 서비스는 하루 1,200∼1,500건의 이용 건수를 기록, 성인물을 포함한 전체 VOD 순위에서 5위 안팎을 기록하고 있다. SBSi 측은 VOD 아바타 등을 제공하는 온라인 컨텐츠 제공, SK 텔레콤 및 KTF에 제공하는 휴대전화 게임 캐릭터 및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다운로드 같은 모바일 서비스, 온라인 게임 등 3개의 창구를 통해 130억원 이상의 부가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문구 업계의 라이센스 계약도 줄을 잇고 있다. 화승(아동화) 모나미(문구류) 손오공(완구) 다우데이타시스템(게임) 오리온(제과) 유원코리아(가방) 등 30여업체(200여 물품)와 20억원의 라이센스 계약을 했고 해외 배급 및 캐릭터 수출도 추진하고 있다. 만화책과 애니메이션만으로 600억원에 달하는 시장이 형성됐고, 라이센스 상품의 판매액까지 합치면 시장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반면 만화의 인기에 착안해 지난해 8월 기획된 아동 뮤지컬 '판도라의 상자'(극단 DNA)는 12월24일 초연 이래 8,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기획자 이승석씨는 "비교적 탄탄한 스토리여서 초기 투자를 많이 했지만 어린이들의 관심이 온통 TV 애니메이션에만 쏠려 관객을 불러 모으는 데 실패한 것 같다"고 밝혔다. 모처럼 형성된 신화 시장이 '블록버스터'에 편중돼 지적 기반의 내실화와는 거리가 멀어질 가능성도 크다.

/박은주기자

한국 신화는

한국 신화의 뿌리는 '단군 왕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뜻 떠올릴 수 있는 우리 신화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 백제 건국에 얽힌 비류와 온조 이야기,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등이다. 모두 건국 신화다. 전인초(59) 연세대 교수는 "우리 신화 중 잘 알려진 것은 나라를 세운 시조 이야기 정도다. 대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출전으로 삼은 것으로, 신화의 자료가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서양에 비해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울 수 있는 신화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얘기다.

역사책 속에 묻혀 개별적·단편적으로만 전해진 것도 한국 신화 대중화의 걸림돌이다. 김화경(56) 영남대 교수는 "서양의 신화는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고 문화적 의미도 입혀져 있지만, 우리 신화는 통합되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연구자들은 무엇보다 한국 신화를 학문의 울타리 밖으로 내놓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입을 모은다. 실제로 한국 신화를 소개한 책은 전문 독자를 위한 학술서가 대부분이다. 일반인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현학적인 내용이 아닌 만큼, 쉽고 재미있는 글쓰기에도 눈을 돌리는 한편으로 이야기꾼 발굴 노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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