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수렁으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듯 하던 세계는 지난 주말 극적인 대세 반전(反轉)을 목격했다. 이라크로 진군하려던 미국과 영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의 저항에 막혀 속수무책으로 퇴각했다. 이어 전 세계 300여 도시에서 반전(反戰) 시위가 물결쳤다. 1,000만이 넘는 민중이 평화 기치아래 연대, 베트남전 이후 최대 시위를 벌인 일대 사건이었다.그 거창한 봉기는 부시 대통령의 충직한 푸들(poodle)로 조롱 당하면서도 전쟁 나팔수 역할에 앞장선 블레어 영국 총리가 놀라 꼬리를 내릴 정도였다.
반전·반미가 드센 독일과 프랑스에서 수십만 명씩 모인 것은 그러려니 하더라도, 미국의 영원한 전쟁 동반자 영국의 런던 거리를 200만 시위군중이 온 종일 점령한 사태에는 영국인 자신도 경악하고 감동했다. 서유럽 반전 연대를 외면한 스페인과 이탈리아도 비슷한 충격을 경험했다.
물론 미국의 전쟁 의지가 꺾일 리 없다. 영국 등 동조세력이 이해 타산을 떠나 줄을 바꿔 서지도 않을 것이다. 당장 전쟁 우려는 낮아졌지만, 미국과 영국은 전열을 가다듬어 전쟁 분위기를 다시 고조시킬 것이고 결국 이라크로 밀고 들어갈 것이다.
반전 선봉에 선 프랑스도 늘 그랬듯이 전리품 배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막차로 참전 대열에 낄 것이고, 독일도 압력을 핑계 삼아 후방 지원과 전후 처리에 동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역사는 무력한 주변국가를 강성한 중심국가들이 유린한 또 하나의 사례를 기록할 것이다.
그러나 유엔 안보리와 런던 등을 무대로 펼쳐진 대세 역전 드라마는 전쟁과 평화를 둘러싼 낡은 정치의 틀과 고정 관념을 깼다는 평가다. 먼저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한 한스 블릭스 유엔사찰단장은 스웨덴 외교관 출신다운 중립적 자세로 안보리의 강대국 지배구도를 허물었다.
90년대 초 북한 핵사태 때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사무총장으로 엄격한 균형감각을 보였던 그의 보고를 토대로 프랑스 외무장관이 전쟁 반대를 역설하고 여기에 여러 나라가 동조하자, 미국과 영국 외무장관은 원고를 버리고 즉석 연설에 나설 정도로 허둥댔다.
미국의 반전 시위는 전쟁사 한 귀퉁이의 각주(脚註)라 할 수 있다. 반면 런던을 온통 마비시킨 거대한 반전 시위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너무나 중차대하기에, 한 무리 정치인과 군인에게 내맡길 수 없다"는 격언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했다. 영국 언론은 숱한 시위 격문가운데, '우리는 민중'(We are the people)과 '내 이름으로는 안돼'(Not in my name)에 주목했다. 또 블레어 총리의 신노동당 노선(New Labour)의 지지기반인 전문직 중상류 계층이 대거 시위에 가담한 것을 특기했다.
이 넥타이 부대의 시위 주도는 정치적 무관심과 참여민주주의의 쇠퇴 따위가 한갓 가설에 불과하다는 분석마저 낳았다. 매스컴 발달로 먼 전쟁의 참상에 익숙한 대중은 그들의 정서를 무시한 채 쉽게 전쟁의 길로 이끌려는 정치에 반기를 들었고, 블레어의 정치 생명이 위태해졌다는 진단이다. 반전 대세를 거스르는 미국과 부시 대통령의 행로도 순탄하지 않으리란 예상이다.
3,000명 남짓한 시민이 국제 반전 시위에 참여한 우리 사회는 아직 먼 곳의 전쟁과 평화에는 무심하다. 그러나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는 경고를 함부로 내놓는 비정한 국제 정치 현실에서 우리의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과 평화는 민중이 선택한다는 자각이 긴요하다.
월드컵에 수백만이 모이는 사회라면, 거리 시위만으로도 이 땅의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민중이 이끌어야 한다.
강 병 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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