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변 마을 경기 연천군 군남면 선곡리 이장 이원태씨는 11일 강을 찾았다가 길게 한숨부터 내쉬었다. 평소 어른 키만큼 찼던 임진강 수위가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고 얕은 곳은 바닥 흙이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마침 놀러 나왔던 관광객들은 "임진강이 이렇게 얕았나"라며 바지를 걷어붙이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이씨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또 시작됐구만."2001년부터 2년간 임진강변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던 임진강 수위 등락(騰落) 소동이 3년째인 올해도 어김없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북 댐건설 '불신의 강'으로 강은 무심히 흐른다. 함경도 마식령에서 발원, 250여㎞를 흘러 서해바다로 접어들 때까지 임진강은 휴전선이네, DMZ 따위 인간사는 아랑곳 않는다.
강변의 사람들도 그 무심함을 닮고 싶어한다. "비라도 세차면 밤잠을 설쳐야 하고, 지뢰 사고에 머리카락이 곤두서지만" 접경지 강변에 터 잡았기에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의 '임진강 수위 소동'은 주민들의 무심과 숙명을 비웃었다.
그 소동의 전말은 대충 이렇다. 북한은 2001년 초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임진강 상류에 '4월5일댐'이란 이름으로 4개의 발전용 댐을 차례차례 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4개 댐의 저수량은 1억3,000만 톤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12월에는 저수량 4억 톤에 달하는 황강댐을 그 위에 짓고 임진강물을 개성특구 개발을 위해 예성강으로 빼돌리려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듯 2년 사이 강물의 수위가 일없이 내려간 게 5차례였다. 반면 큰비도 없었는데 거센 물이 두 번이나 쏟아져 내려 하류 주민들을 혼비백산 시켰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4월5일댐은 '보(洑)'수준일 뿐이고, 황강댐 관련 주장도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정부 당국의 해명은 주민들의 불신의 물살을 이겨내지 못했다.
"식수도 못 먹게 뺀다잖아."
"논농사에 관해선 아랫녘 사람들하고는 얘기가 안돼." 임진강에 생명줄을 대고 농사지어 사는 선곡리 사람들은 임진강물의 깨끗함을 에둘러 표현했다. 1급수 임진강물을 농수로 쓰면 농약을 훨씬 덜 써도 된다는 얘기였다. "벼나 사람이나 좋은 물 먹어야 하는 법"이라고 했다.
이렇게도 자랑했다. "서울서 수질 측정하는 사람들이 왔다가 임진강물과 수돗물을 번갈아 재보더니 '임진강물 그냥 퍼 잡수세요' 하더군요."
그 임진강의 수위가 갑자기 내려가는 일이 2001년부터 연례행사마냥 거듭됐다. 2001년 3월, 그 해 12월, 2002년 2월, 그리고 지난달 1일에 이어 11일 임진강 수위가 평균(1.9m)보다 30㎝ 내려갔다.
"북쪽에서 담수하느라 또 막았겠지. 지금까지야 며칠 반짝이었지만 황강댐 만들고 물길을 돌려버리면 사정이 달라 질거라던데." 선곡리 주민 이모(55)씨의 얘기다.
"북한이 물을 2억 톤이나 돌린다고 하던데…가뭄이 심하면 임진강은 아예 바짝 말라붙을 거야. 농업용수는 차치하고 식수가 큰 일이야." 주민 최모(51)씨의 걱정이다. 주민들의 걱정과 불신감은 며칠 전 내려갔던 수위 30㎝보다 훨씬 깊어 보였다.
댐터지는 날엔 마을은 끝장
선곡리에서 임진강변을 따라 하류쪽으로 4∼5㎞를 내려가면 군남면 진상리다. 최근들어 물난리 잦았던 임진강변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지대가 낮은 진상리는 마을이 완전히 잠기는 피해를 96년, 99년 두 차례나 겪었다. 주민들은 "우리 동네엔 장독이 없다"는 말로 그때를 되새김질했다.
96년과 99년 수해를 가져온 장본인으로 2000년 철거된 연천군 청산면 연천댐을 지목해온 주민들이다 보니 "댐 소리만 들어도 몸이 떨린다"고 했다. 북한의 '4월5일댐'과 '황강댐'은 주민들에게 무시무시한 수해 예비 용의자일 터였다.
"터지기라도 하면 파주 문산까지 나간다고 하던데…." "일부러 터뜨리지 않는다 해도 그네들이 먹고 살기 힘든 판에 제대로 지었겠어. 만일 터지기라도 하면 이 마을이야 끝장이지, 뭐."
이 마을 앞엔 임진강을 가로질러 '북진의 다리' 화이트교가 서있다. 한국전쟁 당시 임진강을 건너 북진하기 위해 화이트라는 미 공병대 소령이 놓았다는 다리다. 그 다리 상류쪽엔 다리를 따라 철제 펜스가 설치돼있다. "북한이 화이트교를 부수려고 홍수 때면 뗏목 따위를 일부러 떠내려 보냈다더구만. 그래서 다리에 철제 구조물을 세웠다지." 마을 주민들의 설명이 붙었다.
"참게 씨가 마를 텐데"
오락가락하는 임진강 수위가 강변에 터잡은 농사꾼들에게 아직 '가능성으로서의 위협'이라면 임진강에서 고기 잡아 먹고 사는 어민들에게는 현실적인 피해다. 어업권을 가지고 참게와 황복 따위를 잡는 이들에게 2001년 10월 밤 난데없이 불어난 물은 강을 가로질러 쳐놓은 500만원어치 '강망' '통발' 따위를 쓸어가 버린 날벼락이었다. 그 물은 이듬해 가을 밤에도 도둑처럼 다시 찾아왔다.
"밤에, 특히 만조에 맞춰 물을 내려보내는 것으로 봐서 고의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파주시 적성면 두지리 어민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어민들은 어구 피해 이전에 생태계 파괴를 더 걱정했다. "물이 말라버리면 그 안에 사는 고기며 참게가 어떻게 되겠소. 또 갑작스레 물이 방류되면 치어들이 휩쓸려 내려가버려."
"그래도 파주쪽엔 사정이 나은편"이라고도 했다. 연천군 지역에선 참게가 씨가 말랐단다. 바다에서 난 참게는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성게가 된다. 그리고 산란기가 되면 딱지안에 '장'을 가득채우고 산란하러 고향을 찾는다. 어민들은 산란하러 나선 성게를 잡는다. 어도(魚道) 없는 댐이 가로막으면 참게는 상류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그 아래쪽 사람들은 잡을 성게가 없게된다.
임진강 어민 100여명의 모임인 파주연천 어촌계장 장석진씨는 "어떻게 든 대책이 마련돼야 하는데 정부 당국에선 아무 말이 없다"고 했다.
"어찌됐든 이런 저런 사정을 좀 알아야 대책이라도 세우고 할텐데. 저쪽이나 이쪽이나 아무 말이 없다." "돈을 그렇게 주고, 남북 화해니 어쩌고 하면서 북쪽하고 그런 얘기도 하나 못하니, 원." 어민들도 게딱지 같은 가슴속에 불신의 '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파주·연천=글 이동훈기자 dhlee@hk.co.kr 사진 류효진기자
■北댐 문제는 거론도 안돼
임진강 상류 북한의 4월5일댐과 황강댐에 대한 건설교통부의 대책은 "아직은 시기상조"로 요약된다.
댐 규모와 숫자, 용도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이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건교부측은 "확인된 임진강 상류의 북한댐은 4월5일댐 2개 뿐인데다 규모도 미미하고, 황강댐은 현재 땅을 파고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오락가락하는 임진강 수위에 대해서도 시차의 문제일 뿐 유량 증감이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다만 북한과의 지속적인 대화로 해결하면 될 일이라는 입장이다.
2001년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합의에 따라 남북은 '임진강 수해방지를 위한 남북실무협의회'를 두고 두 차례 협의회를 열었었다. 하지만 임진강 공동조사 남북공동홍수경보시스템 운영 등 원칙론에만 합의했을 뿐 북한 댐 문제 등에 대해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북한의 황강댐 건설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진강 유역 주민들의 불안감이 높아지자 정부는 올 1월로 예정됐던 3차 실무협의회서 이 문제를 의제로 삼아 거론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협의회 자체가 열리지 못했고 현재 답보 상태다. 건교부 관계자는 "황강댐의 정확한 규모 등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응댐 등의 대책 거론은 너무 앞서나가는 일"이라며 "황강댐 규모가 파악되면 대응댐 격으로 2004년 착공 예정인 군남면 홍수조절지의 규모를 늘릴 수는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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