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국졸이라고 며느리가 손자를 맡기려고 하지 않더라고…."'여자가 많이 배워 뭐하냐'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김모(63·인천 부평구)씨는 학력 때문에 자식과 며느리 앞에서 늘 기가 죽어 지냈다. 한글만 배우면 세상 사는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웬걸, TV에 나오는 영어나 컴퓨터용어가 이해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손주도 못 보는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바람에 그의 '못배운 한'은 커지기만 했다.
고민하던 끝에 김씨는 초등학교 졸업장만 가져가면 입학할 수 있는 화곡동의 성지중학교에 입학했다. 교육부 지정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학교로 1년 3학기로 운영되는 이 학교에 다니는 2년 동안 그의 평균 기상시간은 새벽 5시. 장사를 하는 남편의 아침상을 차려놓고 오전 9시 시작하는 수업시간에 맞추려면 교문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부터 늘 달리기를 해야 했다.
처음 몇 개월은 책만 펼치면 졸음이 쏟아지고 영어단어를 아무리 외워도 돌아서면 머리에서 달아나 버렸다. 그래도 비슷한 연령대의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부요령도 생겼다. 방과 후에는 중국어 회화클럽에 들어 과외활동도 열심이었던 그는 졸업과 함께 성지고등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다. "공부를 하면서 며느리와 대화가 통해 고부갈등이 줄어들었다"는 그는 "처음에는 '집안일이나 하시지'라던 며느리도 '영어나 컴퓨터를 배우시더니 가전 제품 쓰는 법에서 집안 일 처리하는 게 달라지졌다'며 좋아한다"고 전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를 실천하는 실버들이 늘어나고 있다. 국졸, 중졸의 노년층들이 중등교육과정에 진학하고 방송통신고등학교와 검정고시에 도전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70대에 대학에 입학해 화제가 되기도 한다.
전쟁과 가난 등으로 70대 전후 노인세대는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이다. 200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무학이 43.8%인 것으로 나타났다. 글자를 전혀 모르는 노인이 20.2%, 초등학교 졸업이 34.5%, 중·고등학교 졸업이 15.9%이며 전문대 이상 졸업의 고학력층은 6.0%에 불과하다.
요즘의 만학열기는 학업의 기회를 놓친 실버들이 못배운 한을 푸는 것은 물론, 영어나 컴퓨터 등 요즘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능력을 익히기 위해 학교 문을 두드리면서 나타난 긍정적 현상이다. 노인의 저학력은 스스로의 자괴감이나 부모·자녀간의 의사 불소통 문제로 이어져 가족간 갈등의 원인이 돼왔다. 그러나 이들이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공부에 쏟아 부으면서 가족간·세대간 이해가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만학을 통해 노후를 풍요롭게 가꿀 수도 있다. 노후에 하는 공부는 뇌에 계속 지적 자극을 주면서 치매를 예방하고 노화 억제 효과가 크다는 것은 노화관련 연구에서 상식이다.
/김동선기자 weeny@hk.co.kr
● 만학 위한 교육시설은
나이가 들어 정규교육을 받고 싶다면 어떤 학교를 찾아가면 될까.
학력 인정 평생교육시설
교육부 평생교육법에 따라 설치된 학교로 서울에만 10개교가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이 있으며 보통 여름·겨울방학없이 1년 3학기로 2년제로 실시된다는 것 외에는 일반 중등·고등과정과 동일하다. 아직까지 응시생이 많지 않아 보통 중등과정의 경우 초등학교 졸업증명서, 고등과정의 경우 중학교 졸업증명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입학허가가 난다. 입학전형은 2월 말까지. 추가모집은 3월 말까지 실시된다. 중 1, 2학년까지는 학비가 없으며 중3은 분기당 17만원선, 고등학교 과정은 분기당 30만원선이다.
학력 비인정 평생교육시설
서울 시내에 6군데가 있다. 초·중·고등과정이 있으며 각각 1년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영어 한문 등 주요과목 중심으로 수업을 하며 미용이나 직업교육 등으로 특화한 학교도 있다. 2월말까지 입학전형을 받는다. 학비는 월 4∼5만원 수준.
방송통신고교
일반고교 부설 방송통신고는 서울 시내에 5군데가 있다. 출석수업은 일년에 26일이며 나머지는 방송청취강의를 한다. 일년에 11만1,600원.
검정고시 시험 고입검정, 고졸검정은 일년에 2번, 중입은 1년에 한 번 있다.
● "뇌의 노화" 편견과 진실
나이가 들면 머리가 굳어져 공부를 하기 힘들다?
실제로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억력은 60대가 20대의 3분의 2수준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개발된 기억력검사법 CVLT(California Verbal Learning Test)의 한국판 KCVLT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평균 54.05점에 대해 50대는 44.08, 60대는 36.95점, 70대는 32.52점으로 하강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화방지클리닉인 노방클리닉 권용욱 원장은 "뇌의 해마에서 이루어지는 기억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쌓이며 지워지는 것도 제일 표면에서부터 진행된다"며 "가장 최신의 기억이 가장 빨리 없어지고 심층에 쌓인 기억이 나중까지 남는다"고 설명한다. 노인의 기억특성으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반면 조금 전에 외운 영어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즉 기억력만으로 따진다면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학습효과가 현저하게 낮다.
그러나 기억력에도 개인 차이가 있으며 학습성취는 기억력뿐 아니라 분석력 판단력 이해력 등 종합적 사고력에 의해 좌우된다. KCVLT조사에 따르면 연령대별 편차는 10점 이상. 즉 기억력이 떨어지는 20대는 기억력이 좋은 편인 60대 보다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뇌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신경과학연구소장 서유헌(약리학교실) 교수는 "매일 뇌 신경세포가 10만개씩 죽는데 예전에는 뇌세포가 한번 죽으면 재생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에서 뇌에도 세포를 재생할 수 있는 간세포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소개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노력에 따라 기억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진 셈. 또 뇌에서 사용하지 않는 세포가 90%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이때문에 공부가 힘들다'라고는 할 수 없다.
서 교수는 간세포에서의 신경세포 재생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지적 자극'을 든다. 나이 들어서 공부를 하면 뇌의 신경세포 재생이 활발해져 노화를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동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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