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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애국적 판단"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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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애국적 판단"과 진실

입력
2003.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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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새로운 여야관계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그 기대가 벌써 물 건너 갔다고 느끼고 있다.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자 마자 대북 비밀 송금 공방으로 정국이 마비되고, 그 싸움이 내년 4월 총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대부분의 국민이 예측하고 있다.대선 결과는 여야 모두에게 자성의 계기가 되었다. 기존의 판을 뒤집고 노무현이라는 비주류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유권자들의 변화 욕구가 압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북송금 사건이 터지면서 변화 의지는 뒷전으로 밀리고 구태의연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도 당선자도 여당도 야당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북 비밀 송금에 대통령이 연루되었다는 것 자체가 초 법적인 구시대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인데, 해명 역시 시대의 변화를 못 읽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14일 대국민 담화에서 현대의 비밀송금이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수용했다고 밝히고 이에 대한 국민의 '애국적 판단'을 호소했다.

사건의 전모를 모르면서 애국적 판단을 할 수는 없다. 대통령과 임동원 특보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국민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으면서 "선처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 짐작만 하면서 무조건 이해하고 덮어달라는 말인가.

노무현 당선자는 진실 규명과 정치적 타협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 당선자 측근들은 김 대통령의 담화를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더 이상 진실규명이 필요없다는 뜻인지 헷갈린다. 진실을 밝히지 않고 정치적 타협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당선자와 여당은 자신이 만일 야당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북한 핵 사태에 비밀송금까지 겹쳐서 많은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데, 야당이 이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민주당이 지금 야당이라면 더 심한 공격을 퍼붓고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특검제 주장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선 패배의 충격을 정쟁으로 만회하면서 총선을 겨냥하고 있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밝혀내는 성숙한 자세가 요구된다. 이 문제를 잘 풀면 국민의 지지를 얻겠지만 구시대적 공격으로 일관한다면 대선에서처럼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비밀송금 논란은 햇볕정책이나 통일비용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위법행위에 대한 시비다. 대통령이라 해도, 또 남북관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해도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분명한 이정표를 세우기 위한 논란이다.

김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선 불가피하게 비공개로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리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더라도 국민이 의혹을 품고 진실을 알고싶어 한다면 대통령이 그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다. 더 이상의 진실규명이나 법적처리에는 반대하면서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16일 금강산 육로관광에서 돌아온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은 현대의 비밀송금 액수가 5억 달러였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에 현대의 기여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회담직전 2억 달러를 송금한 것도 회담 성사를 확실히 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 동안 청와대에서 부인하던 의혹들이 하나 둘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가 회담직전 쫓기듯 거액을 대출하여 북에 송금한 것은 전적으로 자기의사였나. 거액대출, 환전, 송금을 구체적으로 누가 어떻게 도왔나. 현대상선 관계자들은 왜 산업은행에서 융자한 4,000억원을 현대가 갚을 돈이 아니라고 말했나. 대통령과 측근들은 어디까지 개입했나…. 풀리지않은 의문들이 계속 유언비어로 떠돈다면 그야말로 남북관계의 미래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이제 일주일 후면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다. 시간을 끌지 말고 대북송금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해야 한다. 진실규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이 진실을 알겠다고 하면 알려줘야 한다. 애국적 판단은 그 다음 일이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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