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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 "대마초 사건"의 혹한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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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록의 대부 신중현 <2> "대마초 사건"의 혹한 속에서

입력
2003.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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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검사가 나에게 "이건 정책적"이라고 했을 때, 나는 오히려 그 말이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미 언젠가 닥칠 일이라고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대통령 찬가를 지어 달라는 제의를 즉석에서 거부한 직후였다.1972년 청와대 사람이라며 명동의 사무실로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와 "대통령 찬가를 지으라"며 던진 제의는 운명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당시는 내가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를 치던 때라 지명도가 그야말로 상한가여서, 내가 최적임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즉석에서 돌려 준 대답은 "할 맘 없다. 내 생리에도, 음악성에도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난 그 때 한국적 록을 지향하고 있었다. 정치는커녕, 정치색 짙은 음악에도 관여하고픈 마음조차 전혀 없었고 내 본성에도 통 맞지 않는 요구였다.

당시 모든 국민은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빤히 간파하고 있었다. 민주화를 내팽개치고 독재로의 길을 밟아가던 그들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던 것이다. 통기타 압수나 머리 단속이 자행됐고 멀쩡한 사람이라도 파출소 앞은 괜히 꺼려지는 시대라는 사실을 누군들 몰랐으랴.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나는 정치와 담을 쌓고 있었다. 오직 나의 음악성과 인생만이 내 관심이었다. 그러나 그 쪽의 요구는 끈질겼다. 몇 시간 뒤 명동 사무실에 공화당이라며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어투가 사뭇 달랐다. 그 사람은 거의 애원조였으나 내가 들려 준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의 태도는 변했다. 이럴 바에는 내 음악이 결코 천하거나 경박하고,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정권의 압력에 맞서, 나는 체제내적 저항으로 대응한 것이다.

당시 그룹사운드협회 회장이었던 나는 협회 사무실 안에서 꼬박 일주일간 새 곡에 매달렸다. 다른 곡들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정성을 쏟은 것이다. 그래서 나온 작품이 '아름다운 강산'이다. '신중현과 뮤직 파워'나 이선희가 불러 히트시킨 것으로 대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앞선 '더 맨' 시절인 72년에 만들어진 노래다. 당시 MBC-TV는 18분 동안이나 그 곡의 연주 장면을 방영하는 파격을 단행했다. 가사 자막을 곁들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대접. 내가 추구해온 한국 록음악이 대중성을 띠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권의 위선은 멈출 줄 몰랐다.

결정적 철퇴는 74년 12월 가요정화운동과 함께 벌어졌던 이른바 '대마초 사건'이었다. 서울지검으로 잡혀 들어가 취조실에서 이른바 '물고문'을 당했다. 얼굴에 수건을 덮어 놓고 물을 마구 들이붓는 데에는 당해낼 장사가 없을 것이다. 실은 미군부대 어디서나 뒹굴던 '해피스모크'(대마초)도 맛봤고, 나를 유난히 따르던 히피들이 건네 준 마약 LSD도 몇 번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하고 나면 음악 활동을 전혀 할 수 없게 돼 끊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는 환상 세계에서 노닐지만 깨고 나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환각이었던 것이다. 환각이란 게 제 정신이 들고나면 얼마나 우스운 망상인지.

징역 1년(습관성의약품관리법위반혐의)에 집행유예 3년 선고로 풀려났지만 구치소 생활 4개월은 시작에 불과했다. 75년 5월 긴급 조치 9호와 함께 발효된 대중예술활동정화 방침으로 나의 작품 22곡이 금지당했다. '미인'은 가사 저속과 곡 퇴폐, '거짓말이야'는 불신감 조장과 창법 저속 등 '이현령비현령'이 따로 없었다. 심지어는 애국적 내용을 담은 곡 '뭉치자'마저 방송 부적격과 저속 판정을 받았다. "뭉치자! 우리 모두 다 나라 위해 뭉치자"는 가사가 박 정권 퇴진 요구 데모에 쓰일 우려가 있다는 속셈 때문이라고 모두 눈치로 알았다. 일체의 무대 활동이 금지된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엄동설한 속 시멘트 바닥 위에서 보냈던 넉달은 내 인생관을 바꾸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너댓살적 아버지의 사업을 따라 가 살았던 만주 벌판에서 맛봤던 추위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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