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林東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는 14일 현대의 5억 달러 대북송금 사실을 알고 있었고 국정원 차원에서 환전 편의를 제공했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정상회담은 현대와 북한의 인연을 토대로 추진됐지만 대북송금의 대가이거나 정경유착의 산물은 결코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임 특보에 따르면 현대는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의 1998년과 99년 두 차례 소떼 방북 등을 통해 2000년 5월초 이른바 7대 경협사업을 잠정 합의했다. 현대는 그 '권리금'으로 5억 달러를 북한에 지불키로 했다. 임 특보는 그러나 "(대북송금 문제 협의는) 정상회담이 논의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면서 "어디까지나 민간기업의 자체적인 판단에 따른 상업적 거래"라고 강조했다.
임 특보는 이어 대북송금 과정에 현 정권 차원이 아니라 국정원이, 그것도 제한적으로만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정원장에 재직할 때인 2000년 6월5일께 현대가 권리금 2억 달러의 환전 편의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해와 관련 부서에 검토를 지시했음을 시인했다. 그는 그러나 외환은행에서 환전에 필요한 절차상의 편의를 제공했을 뿐 국정원의 계좌를 빌려주진 않았다고 밝혔다. 또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 특보의 설명 중 주목해야 할 부분은 현대가 남북정상회담 전 과정에 깊숙히 관련돼 있음을 인정한 점. 그는 "당시 현대는 북측으로부터 사업 독점권을 확실히 보장 받기 위해 정상회담을 타진한 것 같다"고 말해 현대가 정상회담 논의를 초반에 주도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이는 "북한도 현대와의 안정적인 경협사업 추진을 위해 남측 당국의 보장과 협력이 필요했고, 김 대통령이 2000년 3월9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대북 경제지원을 확약함으로써 정상회담이 탄력을 받았다"는 관측에 힘을 실어준다.
더 나아가 "현대의 대북 사업 진전이 북측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고, 정상회담 성사에도 기여한 측면이 크다"는 임 특보의 언급은 정부와 현대가 당시 각각 정상회담과 대북사업권 독점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음을 시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당이 "금강산 관광, 현대그룹 구조조정 과정 등에서 정부가 현대에 특혜를 제공했다"고 의심하는 배경에는 이런 인식이 깔려 있다. 임 특보는 이날 "98년부터 2년 동안 남북 당국간에는 이렇다 할 접촉창구가 없었다"고 밝혀 정부가 남북관계에 현대를 활용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현대는 기본적으로 장사꾼인데 정부에 무조건 주기만 했겠느냐"고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상회담은 당초 정부가 발표했던 중국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접촉 뿐아니라 김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 하루 전인 3월8일 싱가포르에서 이미 논의된 사실도 확인됐다. 싱가포르 비밀협상 사실을 일관되게 부인해 왔던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은 이날 "정상회담 탐색전이었다"면서 "북측이 비공개를 요구해 외교 관례상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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