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대북 송금을 허가한 최종 결재자인 동시에 총지휘자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특성상 민간기업이 실정법을 위반하면서 북한에 거액을 지원한다는 자체가 통치자의 묵인이나 결단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도 14일 "현대는 대북송금의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7대 사업권을 얻었다"면서 "평화와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그가 최종 책임자임을 시인한 것이다.구체적인 대목에 관해 김 대통령은 "정상회담 준비에 몰두할 당시 현대 관계에 대해 보고를 잠깐 들은 기억이 있다"면서 "이미 이뤄진 문제이고 남북 평화나 국익을 위해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밝혔다. 2000년 6월9일 2억 달러의 송금이 이뤄진 뒤에야 보고를 받았다는 뉘앙스다. 사전에 보고되지 않은 점은 김 대통령이 2억 달러 송금 이전에 이미 현대의 5억 달러 대북 지원 계획을 수용한 상태임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임동원(林東源) 통일특보(당시 국정원장)와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은 김 대통령의 지휘에 따라 각각 경협 사업 지원과 정상회담 임무가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임 특보는 "2000년 6월5일 현대측의 환전편의 제공 요청을 받고 국정원이 외환은행에서 환전에 필요한 절차상의 편의를 제공했으나 국정원 계좌를 빌려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임 특보는 또 "NSC 상임위는 현대의 대북경협사업 추진현황을 계속 검토해왔고, 남북경제공동체 건설차원에서 적극 지원해 주기로 한 바 있다"고 말해 정부 차원에서 현대의 5억 달러 대북 지원 계획이 수용됐음을 시사했다.
이 같은 정황상 임 특보는 현대의 대북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국정원을 통해 직간접적인 편의를 봐 주는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임 특보는 이날 "현대에 대한 당시 산업은행의 4,000억원 대출 과정이나 5억 달러중 나머지 3억 달러의 송금 여부 등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고 말해 의혹을 증폭시켰다.
박 실장은 현대 경협 사업 체결을 위한 정부 당국간 보증의 확실한 방법인 정상회담 성사의 밀사역을 맡았다. 처음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한 것은 현대측이었지만 이후 북측과 정상회담을 위한 협상에서는 박 실장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박 실장도 이날 "2000년 3∼4월 북측의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정상회담문제를 협의했다"면서 "현대의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은 양측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양측을 소개한 바 있으나 정상회담 협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북측이 국정원이 개입하지 말도록 촉구한 상황이어서 국정원장인 임 특보가 전면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인데다 김 대통령의 측근이라는 점이 작용, 특사역이 박 실장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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