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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겨울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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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겨울 산

입력
2003.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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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위를 솜이불처럼 덮은 눈이 한낮 햇볕에 녹다가, 겨울 밤 찬바람에 얼어붙는다. 그 위에 또 눈이 내리고, 녹고 얼고 여러 차례 반복되어 시루떡처럼 켜켜이 솔아버린 눈밭이 깊다. 바람받이 그늘에 쌓인 눈은 한 길을 넘어 대관령 목장 철책이 파묻혀 버렸다. 남으로 내달리는 백두정맥 등뼈 위는 바람과 눈이 빚어낸 추상화 전시장이다. 겹겹이 몰려오는 파도 형상의 눈 층을 지나, 너른 목초지를 뒤덮은 눈밭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거대한 도화지다.■ 그 위로 배고픈 산짐승들의 발자국 행렬이 길다. 아기 고라니일까, 아니면 산토끼일까. 발자국이 깊지 않은 것을 보면 어린 짐승이 분명하다. 간격도 멀지 않은 작은 발자국들이 인절미 위에 막 눌러놓은 떡살 무늬처럼 예쁘다. 그 옆으로 종종걸음 친 산새들의 발자국은 무슨 상형문자인가. 떼지어 먹이를 찾아 나는 새들의 울음과 바람의 합창은 이 고적한 겨울 산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한다. 그래, 눈 이불 아래 낙엽 옷 속에는 겨울을 견디는 생명들이 있지….

■ 옷벗은 나무들도 서로 손을 맞잡거나, 혹은 어깨를 겯고 이 엄혹한 겨울을 참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모두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려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잉잉거리는 소리는 아무리 추워도 꺾이지 말자는 결의와 다짐일까. 소나무 잣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이고 있는 눈 무게에 지쳐 보인다. 겨울 산이란 원래 그런 모습일 게다. 그런데 고갯마루에 서 있는 전파 중계시설 같은 구조물들이 태초부터 있어 온 겨울 산의 모습을 망쳐 놓았다.

■ 선자령 정상에서 알코올 한 모금으로 언 속을 녹이고, 되돌아 오는 길에 더 큰 부조화(不調和)를 발견한다. 눈 위에 찍힌 내 발자국이다. 사람의 발자국은 왜 그리 크고 깊은가. 왜 그리 자연에 역행하는 모습인가. 내 일행과 낯 모를 겨울 산행자들의 발자국들은 또 왜 그리 어지러운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그토록 비자연적이란 걸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인간의 욕망은 끝도 한도 없이 자연의 숨통을 조르고 있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어야 한다는 깨달음, 그것이 겨울 산에서 얻은 값진 선물이다.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cjm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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