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고 거저 받아 먹으려다가는 큰 코 다친다."포항 코치 시절인 1991년 12월 독일 전지 훈련 때의 일이다. 당시 포항 구단은 예비 스트라이커 황선홍을 레버쿠젠에 유학 보냈다. 유럽 축구를 경험한 나는 황선홍이 '거친 플레이'를 체득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그때만 해도 황선홍은 몸싸움을 싫어하고 천부적인 골감각에만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듬해 독일 부퍼탈에 진출한 황선홍은 무릎인대 부상으로 귀국, 93년 포항에 복귀했다. 부상이 완쾌되지 않아 훈련을 포기하려는 그에게 나는 "한국 축구가 그리 만만하냐. 이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서 유럽 진출을 꿈꿨느냐"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황선홍으로선 섭섭했겠지만 자극제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90이탈리아월드컵 예선 때인 89년 봄 국가대표 트레이너로 처음 황선홍을 만났다. 골 감각이 빼어난, 즉 골을 넣을 줄 아는 선수라는 게 내가 받은 첫 인상이었다. 황선홍이 후계자로 이동국을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다소 게으른 플레이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동국의 문전처리 능력만큼은 누구보다 탁월하다.
황선홍은 이런 저런 영광과 좌절을 겪으면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성장해 갔다. 그라운드에서 그의 플레이를 조금 더 보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35살의 나이로 볼 때 할 만큼은 했다는 생각이다.
지도자로 제2의 축구인생을 선언한 황선홍은 A매치 103회 출전(50골)과 독일·유럽 무대에서 뛰어본 경험이 큰 자산이다. 한일월드컵 첫 골의 영광은 물론 잦은 부상과 독일에서의 실패도 귀중한 보약이다. 특히 나는 부상으로 얼룩진 그의 축구 인생이 앞으로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모든 선수들의 공적 1호인 부상은 자기 관리 소홀 탓도 있지만 무리한 출전이 더 큰 화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황선홍도 '국가의 명예' 등을 이유로 좋지 않은 컨디션에도 출전을 감행한 예가 한두번이 아니다. 후배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도자의 길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점도 얘기해주고 싶다. 지도자의 삶은 선수 생활의 연장선에 있지 않다. 새로운 출발이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뭔가 배우겠다는 열의가 필요하다. 선수들과 함께 파묻혀 뒹구는 열정과 치열한 연구 자세 등은 기본이다. "월드컵대표팀 감독으로 우승까지 이뤄보고 싶다"는 포부처럼 황선홍이 거스 히딩크 또는 베컨바워의 반열에 오르기를 바란다.
/전 축구대표팀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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