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꾸 숨으려 한다. 그의 눈은 세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꾸 아래로 내리 깔린다. 그가 숨어 들수록 세상은 그에게 빠져 든다. 세상이란, 아주 자주, 아이러니컬하다. 90년대 중반까지 량차오웨이(梁朝偉·41)는 분명 홍콩영화의 스타가 아니었다. 재키 챈(成龍), 저우룬파(周潤發), 리롄제(李連杰), 장궈롱(張國榮), 류더화(劉德華) 등 그의 앞에 느와르 스타들이 있었다. 그들은 배우로, 가수로, 탤런트로 수없이 이미지를 양산, 대중을 그물처럼 덮었다. 화려한 스타들 사이에서 그는 빛날 수 없었다. 사진으로 치면, 조금 낡은 흑백 사진이었다. "여덟 살쯤이었나. 아버지가 집을 나간 후로 말수가 적어졌다. 그 때부터 줄곧 나는 소심한 아이로 자랐다. 지금도 사람을 많이 가린다." 생각보다는 쉽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지만 그렇다고 그의 눈빛에서 우울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그래서 그의 이미지는 '메이저'가 아니라 '마이너'다. '비정성시' '중경삼림' '해피 투게더' '씨클로' '화양연화'에서 그는 남성적 매력을 과시하기보다 상처 받은 자의 대리인으로 나왔다. 그러나 많은 배우들이 떠나고, 홍콩 영화가 쇠락한 자리에서 량차오웨이는 빛나는 스타가 됐고 그와 연인 장만위(張曼玉)는 홍콩 영화를 이끌고 있다. 그는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받은 화양연화 같은 작품성 있는 영화와 더불어 꽤 대중적인 영화를 고르는 안목도 있다. 그는 소심하고 우울해 보이지만 꽤 영특하다.
최근 개봉, 한국에 중국영화 붐을 일으키고 있는 무협영화 '영웅'(감독 장이모)과 21일 개봉할 홍콩 느와르 '무간도'(감독 류웨이창)는 '대중'을 슬쩍 잡아 끄는 영화다. "장 감독은 북방인의 기질 그대로다. 직설적으로 말을 하고 고집을 절대로 꺾지 않는다. 반면 류 감독은 낙천적인 사람이다. 상황을 주로 나쁘게 보는 나의 마음을 정말 편안하게 해준다."
시황제 암살을 주저하는 자객 파검이나 경찰대 학생으로 조직의 프락치가 된 진영인은 블록버스터의 전형적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다. 자신의 메인 멜로디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변주'에 능하다. 그러나 스스로에 대한 평가는 좀 인색한 편. "사실 '무간도'에 앞서 우위선(吳宇森) 감독의 '첩혈속집'에서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내 연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만 영화는 훨씬 좋다. 입체적 캐릭터에 조직원이 경찰이 된다는 설정도 특이하다."
그는 이제 좀 변하고 싶어한다. "사실 주위에서는 캐릭터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압력이 심하고, 스스로도 이제는 한가지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다. 누구에게 인정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왕자웨이(王家衛) 감독과 촬영 중인 '2046'에서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역을 맡았다. 신문사 칼럼니스트 역인데, 어렵다. 말투도, 목소리도 많아 바꾸어야 하고. 그게 성공하면 내 인생에 새로운 계기가 될 것 같다." '비정성시' '중경삼림' '화양연화'를 아끼는 작품으로 꼽는 그에게 새로운 사랑의 대상이 생긴 듯하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타로서 사는 게 싫다. 영화가 없을 땐 집에서 그냥 잔다. 그렇게 살다 보면 오히려 영화를 할 때 이상한 에너지가 생긴다. 혹 관객이 나를 사랑한다면, 아마 그런 모습 때문일 것 같다." 165㎝가 조금 넘는 키에도 불구하고 요즘 늘 운동화를 신는다. 그는 평생 작으면 작은 대로 그렇게 살 사람이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 "무간도"는 어떤 영화
홍콩 경찰학교에 입학한 열 여덟 살의 두 청년. 살아온 길도, 갈 길도 다르다. 진영인(량차오웨이)은 경찰학교에서 차출돼 삼합회에 위장 잠입해 십 수년째 전과 8범의 '공'을 쌓으며 보스의 오른팔로 활동하고 있다. 반면 삼합회 조직원으로 경찰학교에 입학한 유건명(류더화)은 잘 나가는 강력반 요원. 그러나 경찰이 대대적인 삼합회 소탕작전에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한 추격전에 돌입한다.
90년 후반 들며 기진맥진했던 홍콩 느와르의 부활을 알릴 만한 영화. 비장한 액션영화에도 '코믹' 코드를 강박적으로 집어넣던 홍콩 느와르의 아류작이 가진 단점을 극복하고, 세련된 극적 구조와 허를 찌르는 결말로 관객들을 빨아들인다.
모스 부호로 암호를 주고 받는 진영인과 경찰 간부, 결국 그들의 손짓을 읽어내고 추적하는 유건명이 사뭇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더구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결말은 죽음조차 허용되지 않는 '무간지옥'을 왜 제목으로 썼는지 설명한다. 이야기가 단선적인 데다 급속한 결말이 다가오는 점이 할리우드 수준급 느와르에 비하면 격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오호장' 이후 11년 만에 호흡을 맞춘 류더화와 량차오웨이의 매력은 이런 덜 세련된 것마저 감싸 안게 만든다.
두 스타에 더해 황후생, 증지위, 진혜림 등 홍콩 배우들이 가세해 4,000만 홍콩달러(6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블록버스터로 홍콩에서 개봉해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영웅'을 물리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감독은 '풍운' '중화영웅'으로 홍콩 영화 붐을 일으킨 류웨이창.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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