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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47> 소설가 복 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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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47> 소설가 복 거 일

입력
2003.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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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선, "문학을 좋아하니까"라는 대꾸가 아마도 적절할 터이다. 실은 이것은 모든 문인들에게 적용되는 얘기일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문학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흔히 문학을 직업으로 삼지는 말라고 말린다. 특히 부모들이 그렇다. 대부분의 사회들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포함해서, 문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고 문학으로 생계를 꾸리기는 힘들었다. 그렇다, 문학은 좋아서 하는 것이다.그러면 "당신은 왜 문학을 좋아하는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좋고 싫은 것은 늘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문학을 하려는 욕망은 혼란스러운 경험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우리의 근본적 욕구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모든 예술에, 나아가서 모든 지적 활동들에, 적용되는 얘기다.

생명의 본질은 정보 처리(information processing)다. 정보 처리는 생물과 무생물을 확연히 구별할 뿐 아니라 생명 현상의 특질을 잘 드러낸다. 사람의 삶도 본질적으로 정보 처리 과정의 연속이다. 그리고 생명체들의 생존은 옳은 지식을 얻는 데 달렸으니, 지식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적절하게 행동해야 살아갈 수 있다.

문학은 사람의 혼란스러운 경험들에서 질서들을 찾아내서 그런 질서들을 되도록 높은 차원의 지식들로 다듬어내는 작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되도록 높은 차원의 지식들'이라는 구절이다. 대부분의 지식들은 부분적이고 분석적이다. 문학은 그런 부분적이고 분석적인 지식들을 종합해서 '이야기'라는 형태를 갖춘, 전체적 지식들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문학의 본질은 이야기며, 문학의 핵심은 '이야기하기(story-telling)'다. 이야기와 가장 거리가 먼 시까지도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기다. 이야기는 일관성을 지닌 흐름이며, 자신 밖의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적 존재다. 그래서 문학은 가장 높은 차원의 지식들이다. 적어도, 그렇게 높은 차원을 지향하는 지식들이다. 그리고 문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경험들을 높은 차원의 질서를 지닌 이야기들로 만들어 들려주는 사람들이다.

이제 "문인들은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주는가?"라는 물음이 나온다. 소설, 희곡, 시와 같은 형태로 문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떤 특질들을 지녔는가? 생명 현상이 본질적으로 화학 반응들이므로, 생명체들은 모두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화학적 기계들이다. 그리고 모두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진화해 왔다. 사람은 온갖 감정적, 지적 활동의 물질적 바탕인 뇌가 다른 종들보다 무척 발달한 종이다. 따라서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화학적 기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피면, 사람은 오랜 진화의 자취들을 많이 지녔다는 것이 드러난다. 실은 그런 자취들을 고려해야, 비로소 사람은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요즈음 생물학에서 진화론이 중심적 자리를 차지한 사정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우리의 본능들과 욕망들은 대체로 우리 선조들이 파충류였을 때 결정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본능들과 욕망들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들은 흔히 '파충류 뇌(reptilian brain)'라고 불린다. 우리 선조들이 포유류로 진화하면서,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를 지닌 본능들과 욕망들이 더해졌고, 그것들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들은 흔히 '포유류 뇌(mammalian brain)'라 불린다. 아마도 이 시기에 지금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즉 기본적 세계관이, 마련되었을 터이다.

현생 인류가 나타난 것은 몇백만 년 전인데, 몇백만 년이란 시간은 생명체들의 진화 과정에서 아주 짧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무척 복잡하고 추상적인 지적 작업을 할 수 있는 '인간 뇌(human brain)'를 빠르게 갖추었고, 그런 뇌를 활용하여 문명을 쌓아 올렸다. 인류 문명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현상이다. 단 몇만 년 동안에 이처럼 거대하고 복잡하고 지속적인 현상이 나왔다는 것은 경이롭다. 문명은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사람이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생물적 유산들은 문명의 영향에 밀려 적잖이 속으로 숨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아직 파충류와 포유류였을 적에 형성된 우리 마음의 부분들은, 즉 본능들과 육체적 욕망들과 세계관은, 그런 문명을 보면 두려움에 질린다. 현대 문명은 그런 원시적 마음의 부분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고 위협적이다. 자연히, 사람은 자신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들에 대해 두려움을 품는다.

문제는 우리를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득한 옛날에 형성된 그런 본능들, 욕망들 그리고 원시적인 세계관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이 우리의 가치 체계를 근본적 차원에서 결정한다. 그래서 우리 몸과 마음 속엔 짐승과 사람이 함께 살며, 그 둘은 때로 협력하고 때로 다툰다. 인류 문명이 흔히 정신분열적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랍지 않다.

예술은 그렇게 두려움에 질린 마음의 원시적 부분들을, 즉 수성(獸性)을, 대변한다. 갑자기 나타나서 빠르게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인성(人性)과 그것을 두려워하고 시기하는 수성이 맞설 때, 예술은 수성을 대변한다. 사람의 활동들 가운데 학문과 기술에선 인성이 큰 몫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예술은 사람 전체를 드러내므로, 우리 성품 속에 있는 수성이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학문이나 기술에서보다 훨씬 큰 목청을 얻는다.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지성과 과학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고 문명을 거세게 비판하는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때문이다. 사람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려는 예술적 노력은 어쩔 수 없이 현대 문명에서 점점 작은 목소리를 내게 된 수성을 부각시키게 마련이고, 그런 편향은 지성보다 감정을, 과학보다는 직관을, 문명보다는 자연을 높이게 된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중요성이 있다. 예술은 사람의 삶에서 지성과 과학이 지닌 압도적 우위에 맞서 감정과 원시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짐승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현상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미국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는 "시인들은 문명의 후위(後衛)다"라고 했다. 문명이 후퇴할 때 맨 뒤에 남아서 주력 부대가 철수하도록 돕는 부대가 바로 시인들이라는 얘기다. 그는 시인들은 게처럼 옆으로 걷는 사람들이며,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문명의 위기를 느낀다고 했다. 아마도 아이슬리는 '시인들'이라는 말로 모든 문인들을, 어쩌면 모든 예술가들을, 뜻했을 터이다.

인류 문명이 쇠퇴하거나 위기를 맞았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이슬리의 얘기가 본질적으로 옳다고 여긴다. 우리 몸과 마음 속에 있는 수성과 인성이 너무 뚜렷이 갈라서는 것은 분명히 위험하다. 우리 속의 짐승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의 정체성과 방향 감각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문명이 발전할수록, 문명에 몰린 우리의 수성을 옹호하는 예술의 기능도 역설적으로 중요해진다. 그러나 예술이 그런 기능만을 수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술이 사람 속의 수성과 인성을 조화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술이 지향하는 '되도록 높은 차원의 질서'에 보다 가까이 가는 길이다. 예술을 그저 수성의 대변자로 국한시키는 것은 예술을 왜소하고 얄팍하게 만든다.

우리의 수성과 인성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문학에 또 하나의 차원을 더할 것이다. 그러면 문학은 보다 높은 차원의 질서에 이를 수 있고, 아울러 사회적 문제들과 연관성(relevancy)이 있는 지적 활동이 될 것이다.

문학은 예술의 다른 장르들보다 이런 일에 훨씬 적합하다. 소설은 특히 그렇다. 언어와 문자를 매체로 삼은 덕분에,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지각에 직접 의존하는 예술의 다른 장르들과는 달리, 문학은 추상적 개념들을 다룰 수 있다. 즉 수성과 함께 인성도 어렵지 않게 포용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일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선험적으로 문학이 다룰 수 없는 주제는 없다.

아쉽게도, 문인들은 문학이 지닌 그런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지금 문학이 지닌 그런 능력을 제대로 쓰는 분야는 과학소설(SF) 뿐이다. 현대 문명이 놓여진 바탕이 과학과 기술이므로, 과학과 기술을 다루지 않고서는 현대 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얘기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 속에 과학과 기술을 품은 작가들은, 과학소설 분야를 벗어나면,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인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수성과 인성을 조화시킨다는 과제에서 나는 작가로서 설 자리를 본다. 그래서 점점 크고 복잡해져서 우리에게 점점 두려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현대 문명을 제대로 그려내는 이야기들을 쓰고 싶다.

● 연보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1967∼83년 기업은행, 한국과학연구원 선박연구소 등 근무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전작 발표 등단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 속의 나그네' '파란 달 아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목성잠언집'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사회평론집 '현실과 지향' '진단과 처방'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산문집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소수를 위한 변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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