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베를린 선언·정상회담 밀실협상 산물이었나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베를린 선언·정상회담 밀실협상 산물이었나

입력
2003.02.13 00:00
0 0

요시다 다케시(吉田孟·55) 신니혼산교(新日本産業) 사장의 증언은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2000년 3월10일(한국시간) 베를린 선언, 나아가 6·15 정상회담도 남북 정부간 밀실협상의 산물이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또 베를린 선언 직전에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남북간 비밀협상장 주변에 정몽헌(鄭夢憲) 당시 현대그룹 회장 등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 정상회담이 현대의 대북지원의 결과이거나, 최소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싱가포르 비밀협상은 시점상 김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김 대통령이 당시 프랑스 등을 거쳐 베를린으로 향하는 시각에 박지원(朴智元) 문화관광부 장관(현 청와대 비서실장)은 싱가포르에서 송호경(宋虎景)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 요시다씨는 남북 정상회담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뒤 두 사람의 회동을 주선했고, 실제로 협상과정을 주변에서 목도했다고 증언했다.

2000년 3월8일부터 열린 싱가포르 협상의 내용은 시시각각 김 대통령에게 전달됐고, 그 결과물이 정부 차원의 대북지원을 확약한 베를린 선언이었다는 정황이 성립되는 셈이다. 이는 김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하고 북측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는 청와대의 주장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대목이다.

당시 북측은 정상회담을 포함한 전면적인 남북관계 복원의 대가로 현대의 대북 사업에 대한 남한 정부의 보증, 막대한 규모의 사회간접자본(SOC) 지원 등을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해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은 남측이 도로 항만 철도 등 SOC 확충, 식량·비료지원 등을 베를린 선언문에 명시키로 합의함으로써 성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측이 협상장 주변에 등장한 사실은 대북 비밀송금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당시 현대는 북측과 금강산 관광 등 소위 7대 대북사업을 논의중이었고, 실제로 3개월 후 사업권의 대가 2억 달러를 송금했다. 북측과 현대는 대북 경협에 대한 남한 정부의 협조가 절실했고, 정부는 이를 간접 지원하는 대신 정상회담 등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박 실장이 현대의 대북 지원 규모를 북측과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베를린 선언문은 김 대통령이 발표하기 10시간 전인 2000년 3월9일 오후 2시 판문점을 통해 북한 김용순(金容淳) 노동당 대남비서 등 북한 고위층에 전달됐다. 박 실장과 송 부위원장은 이후 정몽헌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3월17일부터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에서 6차례에 걸쳐 추가 협상을 갖고 4월8일 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