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중 기획 '동양의 신화'가 지난주 39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화여대 중문과 정재서(鄭在書·51) 교수가 지난해 5월1일부터 매주 수요일에 연재한 이 글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양에도 서구 못지 않은 웅혼한 신화가 살아 숨쉬어 왔음을 보여주었다. 세계를 창조한 거인 반고, 인류의 시조 복희와 여와 남매를 거쳐 지하세계의 지배자 후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다양한 창세·건국·영웅 신화를 독자적 시각으로 소개한 연재를 마치며 한국 신화 연구 권위자인 서대석(徐大錫·61) 서울대 국문과 교수와 집필자인 정 교수가 '동양 신화 읽기의 의미'를 주제로 대담했다.
서대석=흔히 신화를 기적 같은 이야기로 범박하게 이야기한다. 요즘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신화 붐은 어릴 때 야망을 가지라는 뜻에서 어른들이 신화 읽기를 가르친 것이 상승효과를 내고 있다. 한편으로 신화란 재미 있으니 휴식하는 기분으로 접해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서양 신화에 비해 동양 신화가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았던 사정을 감안하면 '동양의 신화' 시리즈는 동양 신화 대중화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고 본다. 중국 신화라는 게 원문을 보면 별스럽게 재미날 것도 없겠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합해 다시 엮었더니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됐다.
정재서=길을 잃어버리면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가게 된다. 원시 인류가 삶을 이해한 방식인 신화도 기계 문명과 이성 중심의 문화에 둘러 싸여 '좌표 상실' 상황에 처한 현대인에게 본래의 자리를 생각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신화는 논리적이고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감성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신화는 또 무한한 상상력을 준다. 우리는 창조적 삶의 동력을 신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추세를 보면 그 상상력 배양에 편식의 우려가 있다. 한국 신화, 동양 신화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그리스 로마 신화에만 열을 올린다. 신화를 균형 있게 이해하고 받아 들일 때 우리는 세계를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서대석=신화가 대개 그렇지만 그리스 신화는 특히 전승 그대로가 아니다. 지식인들이나 신화학자들이 수집해서 엄청나게 윤색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신화는 예술성, 문학성이 고양된 형태로 꾸며졌다.
정재서=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산해경(기원전 4세기께 나온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리서)에도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이 많이 등장한다. 하지만 거기에 나오는 신농씨만 해도 좋은 이미지로 나온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루스 같은 반인반수는 처치해야 할 괴물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서술이 인간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이 되다 못한 존재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방증이다. 반인반수가 인간 중심으로 해석되지 않고 원래 의미대로 보존돼 있는 산해경이 신화의 본 모습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대부분 토머스 벌핀치의 영역본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신화의 원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벌핀치는 독실한 청교도라서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이야기는 빼버리고 자의적으로 짜깁기한 것이 많다.
서대석=동양 신화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신화를 창세·영웅·왕권 신화 등으로 나눠 봐야 한다. 구약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면서 진흙으로 남자부터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든 것으로 돼 있다. 진흙으로 사람을 만든 건 중국 신화의 여와도 마찬가지지만 거기에는 남녀 구분이 없고 대신 존귀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의 차별이 있다. 특히 만주 신화를 보면 창조 여신 아부카허허가 여자를 먼저 만든 뒤 그 여자의 살과 여기저기서 조금씩 떼어온 것들로 남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서양의 영웅 신화는 헤라클레스, 프로메테우스 등 영웅의 일생이라는 공통된 서사 유형을 가지고 있다. 부친에게서 버림을 받고 부자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국의 걸왕, 탕왕, 문왕 등 천명을 받고 건국에 성공한 동양의 영웅 신화에서는 돈독한 부자 관계가 강조돼 있다. 특히 한국 신화에는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결국 아버지의 권리를 계승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동양의 가부장제 전통이 부계 씨족 단위로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재서=동·서양 신화는 신과 인간의 지위에 대한 사고가 다르다. 동양은 신과 인간의 구별이 엄정하지 않다. 신을 인간의 정점(頂点) 정도로 인식하며 성인과 신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데 비해 서양은 양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간극을 둔다. 이런 신관(神觀)의 차이로 영웅 신화의 전개 양상이 달라진다.
동양 신화 중에서 만주 신화는 특히 흥미롭다. 여성신이 일반적인데 그게 신화의 더 원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중국 신화의 서왕모도 처음에는 혼자 세상을 주재하는 삼엄한 여신이었는데, 한대(기원전 202년 이후)에 동왕부라는 남자 배우자 신이 나타나 단순히 아름다운 여신의 지위로 격하된다. 흙으로 사람을 빚는다는 설정이 토기 제작 경험 등과 연관된 사유라고 볼 수 있듯 여신의 지위 하락도 신석기 시대 이후 농업 혁명으로 계급 분화와 함께 가부장 의식이 생겨난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서대석=우리가 중국 신화, 한국 신화로 나누는 것은 요즘 들어 하는 얘기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그런 구별이 없었다. 과거 교과서로 읽었던 '사략(史略)'이라는 책은 중국의 삼황오제부터 하, 은, 주, 춘추·전국 시대를 거쳐 진시황의 천하통일까지 다룬 것이다. 전통사회 지식인들은 그 책을 통해 중국 신화를 인류의 역사로 공부했고, '동국통감'을 통해 단군과 주몽, 박혁거세, 김수로왕 등 한국 신화를 배웠다. 조선시대 중국·한국 신화 교육은 오늘날보다 훨씬 비중 있게 이루어졌다.
이런 점에서 중국 신화는 상상력을 자극해 꿈과 낭만을 심어주고 교훈과 지혜를 주는 이야기로 큰 몫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중국 신화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화이관(華夷觀)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아시아 주변 국가에 두루 영향을 끼쳐 중화주의를 파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재서=민족끼리의 다툼으로 통치 주체가 계속 바뀌면서 이전 신화가 말살되거나 지위가 하락하는 등의 부침을 겪은 중국 신화를 위앤커(袁珂) 같은 중국 신화학자들이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애를 썼다. '중국신화전설' 같은 책을 낳은 이런 작업은 긍정적으로 보면 지역 신화의 풍토성까지 반영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신화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런 작업이 한족 중심으로 여러 민족의 신화를 통합하는 모양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정치적 통일을 신화로도 구현하려 한 의도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한족 신화 체계에 무리하게 소수 민족 신화를 끌어댄 견강부회도 있다. 결국 현재의 체계화한 중국 신화는 모든 신화의 근원을 한족 신화의 토양에서 나와서 전파된 것처럼 펼쳐 보이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서대석=그리스 로마 신화나 중국 신화 못지 않게 우리에게도 신화가 풍부하다. 일부에서 한국에는 신화가 없다는 소리도 하는데 그건 우리에게 창세 신화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신화의 정의는 여러 가지지만 대개 '신성한 이야기' 정도로 보는 데 일치한다. 우리는 단군 신화를 비롯해 각 나라의 국조 이야기, 무속 제전의 신들 이야기가 있다. 성씨나 종교마다 신성한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기능주의 관점으로 사회를 통어(統御)하는 기능을 가지는 것을 신화의 속성으로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보면 우리도 신화가 상당히 많다.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신의 질투나 사랑 이야기가 적다는 이유로 신화가 없다는 것은 잘못이다.
/정리=김범수기자 bskim@hk.co.kr
김영화기자 yaaho@hk.co.kr
■ 신화 그리기를 마치며
과거에 대한 기억은 항상 현재를 풍성하게 만든다. 역사에 대한 기억은 형태를 통해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게 되는데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조형 분야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자의 서술에 의해 과거를 더듬게 되는 한국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일정 부분 우리의 상상력을 가로막는다. 단지 TV 사극에 나오는 조선 왕들의 복식이나 신하들의 옷만으로는 그 당시의 역사를 인식하긴 어렵다. 하물며 아시아 국가 간의 경계가 오늘과 달랐던 원시 문화 시대의 모습을 추적하는 데는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갖고 있는 상상력은 자연상태의 경험에서 확산된 것이다. 합리적, 과학적 사고가 요구되는 현대적 문화창조도 실은 이런 경험과 상상력의 관계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대 미술이 고고 문화를 기웃거리게 되는 것도 어쩌면 모더니즘 미술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이다.
'동양의 신화'를 통해 나는 신문 그림 그리기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문자와 그림의 간단치 않은 관계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미루어 둔 채 다급하게 문장을 읽어 내면서 내 안의 형상을 끄집어 냈다.
일정 부분은 현대 서구회화의 습관적 관습이 내 그림 그리기의 반복된 붓놀림을 통해, 또는 종이 오리기를 통해 즉각적으로 거칠게 표현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산해경' 주변에 그려진 과거의 그림을 그대로 색깔만 바꾸어 옮기기도 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아시아 역사 속에서 변형된 신화 내용의 그림을 찾아보면서 문자적 상상력과 결합한 그림을 그려본다면 나은 신화 그림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림 그리기가 더욱 즐거웠던 것은 북한 너머에 있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대한 오랜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또 그 이전의 조형적 습관이 만주 벌판에 널려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게 이번 신화 그리기에서 나만이 누릴 수 있었던 즐거움이다. 미완성인 채로 계속 그려낸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앞으로의 나의 작업이나 그 동안 그림을 보아준 한국일보 독자와 매번 슬라이드를 찍어준 동혁씨, 그리고 무엇보다 정재서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서용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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