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 주변으로 학교가 들어서고 있다. 살 길 찾아 부모 손에 이끌려 떠났던 아이들이(비록 그 아이는 아니지만) 돌아오고, 을씨년스럽던 폐교들도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마른 볏단처럼 누렇게 떠가던 마을들에도 덩달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경남 함양, 산청과 거창, 전북 남원의 산골 마을들이 '대안교육'의 벨트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왜 하필 지리산 자락일까. 주민들은 '산(지리산)의 조화'라고 했다.지리산과 덕유산이 만나는 경남 함양군 백전면 평정리. 내달 개교하는 대안대학(녹색대학)이 터를 잡은 마을이다. 노인들과 함께 게이트볼을 치던 박종수(71)씨는 "있던 핵교도 문 닫는 깡촌인디 대학교가 들어서는 것은 사람 힘이 아닌기라. 산이 부른기지"라고 했다. 순서를 기다리던 다른 노인(68)이 끼어 들며 "빨갱이들이 끝까지 활동한 산이 지리산 아이가. 그때 남은 반골 혼이 안즉(아직) 남아 그냥 핵교는 안돼. 그래서 '대안' 자가 붙은 거 아이가."
6년 전 문을 닫은, 대안대학이 들어설, 백전중학교. 눈이 녹지않은 운동장 너머 교사(校舍)는 페인트칠이 벗겨진 채 서 있었다. 하지만 건물 안은 달랐다. 페인트와 진흙 범벅이 된 작업복 차림의 10∼40대 '인부' 10여명이 강의실과 도서관, 교수실 등으로 쓰일 공간을 나무로 덧씌우고 있었다. 모두 녹색대학의 교직원과 첫 신입생들이다. 개강도 하기 전에 학교를 찾은 이들은 함께 생활하며 캠퍼스 만드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녹색대학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전북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 앞 '작은학교'는 아직 방학 중이었다. 변변한 교실도 없어 컨테이너 박스 6개가 학교 시설의 전부지만 교사들은 "그림처럼 펼쳐진 자연이 바로 학교"라고 했다. "뭔 이유가 있다요, 워낙 산세가 좋고 농사도 지을 수 있응께 도시 아이들도 오는 것이지라." 주민의 말처럼 작은학교 학생 30여명은 대부분 서울 아이들이다. 마을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45)는 그 학교가 신기하다고 했다. "쬐깐한(작은) 학교여도 운동회도 열고 할 것은 다 하드만." 나서 아직 한 번도 서울 구경을 못했다는 그는 "서울에는 좋은 거 다 있을 틴디, 졸업장도 안주고 검정고시 보는 학교가 뭐가 좋다고 아그들을 보내는 지 모르것소"라며 웃었다.
작은학교에서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단성 지리산IC를 빠져 나와 찾아 간 곳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호리의 '학림학교'였다. 전교생 5명에 폐교된 금만초등학교 백곡분교를 수리해 사용하고 있다. 운동장엔 오전부터 학생들이 뛰어 놀고 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들이지만 이곳에선 당당히 제 몫을 해내고 있다. 인가를 준비하고 있는 터라 교사 자격증도 없는 이련우(31) 교사가 아이들의 생활부터 검정고시까지 도맡고 있다. 그나마 부산 경남 지역 교사들과 서울 등지에서 찾아온 대학교수, 기업체 임원, 화가 등이 자원봉사 수업을 하고 있다.
지리산 일대에 대안학교가 들어서는 것에 대해 대안학교 관계자들의 생각도 표현만 다를 뿐 주민들과 비슷했다. 녹색대학 허병섭 운영위원장은 "지리산 기운을 받은 사람들의 이심전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리산은 우리 역사와 삶이 녹아 있고 생태와 환경이 잘 보존된 곳입니다." 작은학교 이경재(45) 학교 대표는 지리산 종주 경험을 대안학교와 연결시켰다. "소위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치고 지리산에 오르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 다들 힘들고 지칠 때 어머니 산인 지리산에 올라 마음을 다잡곤 했으니까요. 그때 기억이 대안교육을 하는 활동가에게 지리산을 찾게 하는 게 아닐까요."
대안학교가 지리산 일대에 잇달아 들어서면서 대안학교간의 연대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다. 녹색대학은 이미 남원 하동 산청 거창 등 지리산 일대의 학생들에게 '지리산 권역제'라는 등록금 할인제도를 내놨다. 장원 상임위원장은 "각자 교육현장에서 얻은 대안교육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장을 조만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가를 준비 중인 학림학교는 인근 산청군 신안면 외성리 간디학교와의 공조를 추진 중이다. 학교대표 박해성 교사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인 만큼 대안학교에 가고 싶어도 월 30만원을 낼 수 없어 간디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받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마을에 들어선 대안학교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반응은 기대와 우려가 반반 섞여 있었다. 우한선(66)씨가 "노인들만 200명 남짓 사는 마을에 녹색대학이 생겨 젊은 사람 200명이 들고 나면 장사도 될 끼고 우리 모르는 농사뱁도 가르쳐 줄 끼다" 하자 이종민(75)씨는 "환경 챙긴다고 농약도 못 치게 할까 걱정"이라고 했다.
간디학교 부근에 사는 한 주민은 "어차피 외지 사람들이 오는 '귀족학교'라 신경 쓰지 않는다"면서도 "지난해엔 중학교 문제로 데모를 해쌌는 통에 마을 분위기까지 뒤숭숭했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학림학교 인근에 사는 장모(46)씨는 "휴가철만 되면 젊은 사람들이 폐교에서 불미스런 사고를 쳐 골치가 아팠다"면서 반기는 눈치였다.
경남 함양과 산청, 전북 남원에 터를 잡은 대안학교는 모두 30분∼1시간 거리에 있다. 가르치는 과목도 내세우는 교육철학도 조금씩 다르고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생각도 달랐지만 목표만은 한가지였다. "기왕 지리산 자락에 사람 키우겠다고 나섰응게 잘 되야지라."
/남원 산청 함양=글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1956년 거창고 첫 대안학교 간디학교등 96년후 활성화
지리산 자락에 대안교육의 첫 삽을 뜬 것은 경남 거창의 거창고다. 국내 최초의 미국유학생으로 대전신학대 부학장직을 마다한 고(故) 전영창(1917∼1976) 선생은 1956년 '벽지 교육'의 뜻을 세우고 빚을 얻어 폐교 직전의 거창고를 인수해 교장에 취임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의해 인사보좌관으로 내정된 정찬용 광주 YMCA 사무총장도 거창고 교사 출신이다.
거창고는 대안교육의 선구자로 평가 받고 있지만 실제론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다. 현대적 의미의 대안학교는 96년 정부의 '학교 중도탈락자 종합대책'이 발표된 후 붐을 이뤘다. 이 때문에 대안교육 관계자들은 97년 철학박사 양희규씨가 세운 경남 산청의 간디학교를 지리산 대안학교의 시작으로 여긴다. 98년 특성화 고교로 인가 받은 간디학교는 '공동체적 인간' 등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대안학교의 모범으로 성장했다.
국내 첫 대안대학인 경남 함양의 녹색대학은 95년부터 진행된 '환경대학' 등 대안적 대학설립 논의의 결실이다. 녹색대학을 창립하는 사람들인 '녹창사' 33인에는 쟁쟁한 활동가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초대총장에 취임하는 장회익 서울대 물리대 교수를 비롯해 김지하(소설가) 최창조(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이정우(서강대 철학과 교수) 허병섭(빈민운동가) 박노해(시인)씨 등과 이현주 목사 수경스님 도법스님 등 종교인도 포함돼 있다.
전남 남원의 작은학교(비인가)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삼라만상은 모두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불교의 생명운동)의 일환으로 2001년 문을 열었고, 산청의 학림학교는 아직 인가 준비 중이지만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미리 찾아와 대안공부방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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