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위기의 한복판에 미국당국자들의 때아닌 '주한미군 철수'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이한 것은 미군철수론이 과거처럼 국내의 진보적인 통일운동 단체가 아니라 미국 정부와 조야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과 월포위츠 부장관이 미군감축 용의를 표명했다는 언론보도까지 나오면서 파장은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형국이다. 가뜩이나 북핵 문제가 꼬여가고 한미간 대북정책 이견이 노출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고위관리가 미군감축 문제까지 거론하자 그 진위여부를 놓고 우리 사회는 적잖이 당혹해 하고 있다.그러나 지금의 주한미군 감축 논란은 성격상 미국의 실질적인 철수의지로 해석하긴 힘들다. 적어도 미국이 자신의 국가이익 차원에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을 철수할 의향이라면, 그 같은 선택을 가능케 하는 대내외적인 환경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예컨대 1970년대 중반 미 카터 대통령 시절에 불거져 나왔던 주한미군 철수론만 해도 당시 민주당 정부의 대외정책 전반의 수정과 맞물린 측면이 강했다. 즉 미중 수교가 진전되고 베트남전에서 미국 패배가 확정되면서 닉슨 후임으로 당선된 카터 행정부는 자연스럽게 미국의 개입주의 완화와 해외주둔 미군축소를 국가전략 차원에서 검토했던 것이다. 미중 관계 개선으로 동아시아의 대외환경이 데탕트로 바뀌는데다 베트남전 패배의 교훈을 되새겨야 할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의 미군감축을 충분히 선택 가능한 전략으로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미국이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주한미군 철수문제를 거론할 계제가 아니다. 부시 행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의 개입주의적 대외정책을 강조하고 있고 9.11 테러 이후 반테러전쟁의 입장에서 북핵 문제를 심각한 안보우려 사안으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거론되는 미국측의 주한미군 감축론은 말 그대로 철수의지가 아니라 다른 의도를 함축하고 있다. 최근 한국 내 반미정서 확산을 우려한 미국식 '한국 길들이기'의 측면도 없지않은 것이다. 지난 연말부터 미국 내 우파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이른바 '배은망덕론'을 운운하면서 "한국이 원한다면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한국 내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 역시 연이은 촛불시위와 한미동맹 약화 조짐을 우려하면서 이 같은 배은망덕론에 동조했다. 이번에 논란을 일으킨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월포위츠 부장관의 발언 역시 정확한 사실확인은 유보되어 있는 상태다.
오히려 최근 주한미군에 관한 미국측 언급은 즉각적 철수를 의미하기보다는 미군기지 이전과 전력 재배치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용산 등 미군기지 이전 문제는 이미 한미간에 협의해온 사안으로,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따른 전반적 기지 재조정 차원에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전력 재배치 역시 미국의 군사혁신(RMA) 계획에 따라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해외주둔군 배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즉 한강 이북에 배치되어 있는 주한미군 2사단이 사실상 북한의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들의 후방배치와 주한미군을 해·공군 위주로 개편함으로써 자국 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동시에 유사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변화를 고민 중인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미국측이 주한미군의 감축 내지 철수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먼저 호들갑을 떨며 '철수의지'로 확대해석 또는 과장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법석을 떨면 떨수록 미국으로서는 '철수' 운운 만으로도 한국을 길들이는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21세기 탈냉전 시대에 걸맞은 한미 파트너십과 보다 합리적인 한미동맹 관계를 고민한다면 미국에서 흘러나오는 미군 철수 논란만으로 온 사회가 법석을 피우는 것은 분명 온당치 않다. 그것은 과거 냉전시대에 통했던 우리의 어두운 자화상이었다. 지금은 철저한 분석과 냉철한 대응이 필요한 때다.
김 근 식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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