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럼스펠드 발언 내용·의미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고위 대표단과 만나 한미 동맹관계의 재조정 차원에서 주한미군 기지 이전과 재배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3일 면담에 참석했던 대표단측과 주미 대사관 관계자, 미 국방부측 얘기를 종합하면 럼스펠드 장관이 미군의 철군이나 감축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한 것 같지는 않다. 주한 미군의 지위 변경에 관한 그의 발언은 원론적인 수준이었다는 게 참석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대표단 일원인 유재건(柳在乾·민주당) 의원은 럼스펠드 장관이 특별히 한국을 지칭하지 않은 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80여 국가 중 그 나라가 원하지 않는데도 주둔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제프리 데이비스 미 국방부 동아·태 담당 대변인도 "원론적인 수준의 얘기가 있었을 뿐"이라며 "지금 이 건물(국방부) 내에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 한국의 정부를 이끌 노 당선자의 대표단에게 '주한 미군의 효율적 배치'를 꺼낸 럼스펠드의 의도는 원론의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는 지적들이다.
조지 W 부시 정부는 2001년 10월 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 및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 및 편재를 재편하는 내용을 담은 국방정책검토(QDR)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한 상태다. 럼스펠드 장관이 주도한 이 보고서의 골자는 육군 병력의 감축과 해군·공군력의 증강으로 요약된다. 미 국방부 관계자는 "미군 구조조정(configuring)의 핵심은 병력 수(number)가 아니라 운영능력(capacity)"이라고 말해 미국의 계획이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런 계획을 추진하려는 미국에 한국측의 한미 관계 재조정 요구는 한국의 지원 하에 주한 미군의 실질적인 위상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 군 기지 이전과 육군 병력 감축으로 보강될 화력(火力) 및 첨단 전력 비용의 상당부분이 한국 정부로 전가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한반도의 특수성 때문에 미 정부의 주한 미군 지위 변경 계획은 그 자체로 한국 정부를 제어하는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원론 수준의 주한 미군 철수 언급만으로도 한국내의 반미감정과 한국 정부의 대등한 관계 요구를 제어할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있다. 미측 인사들의 잇단 주한미군 관련 언급은 바로 이 같은 효과를 겨냥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美2사단 인계철선役 변화오나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의 발언중 주목할 만한 부분은 한수 이북 주한 미군부대의 재배치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 차영구(車榮九) 정책실장은 "럼스펠드 장관은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대해 관심이 지대한 인사"라고 지적하고 "(정말 그 말을 했다면) 그건 LPP를 바탕에 깔고 한 말일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연합토지관리계획이란 미군병력은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하면서 부대방호 수준, 주요시설의 질적 향상을 위해 미군기지와 훈련장을 2011년까지 단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것으로 지난 해 국회의 비준을 받았다. 이 안에 따르면 주한미군에게 공여 되는 토지는 현재 7,400만평에서 3,200만평으로 줄어들고 주요 기지는 41개에서 23개로 통폐합된다.
미국 관리들이 말하는 '한수 이북 부대'는 미 보병 2사단을 일컫는다. 미 2사단은 지금까지 전쟁발발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인계철선(Trip-wire) 역할을 맡아왔다. 따라서 럼스펠드의 이번 발언은 인계철선 기능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변화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또한 교전시 인명피해가 많은 지상군은 줄이되 첨단 무기를 갖춘 해·공군을 강화하는 미국의 장기적 국방정책의 일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북 핵 시설에 대한 국지타격등 유사시에 대비, 북한측의 장사정 야포에 노출돼있는 미2사단을 안전한 후방으로 빼려는 사전포석이라는 극단적인 분석도 있으나 신빙성은 희박하다.
이에 대해 국방부 관계자들은 터무니 없는 '시나리오'라고 반박한다. 국방부 고위관계자는 "미국은 한반도 지역에서 어떠한 전력 약화나 공백이 발생하는 데 반대한다"며 "주한미군 병력의 이동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면 미측은 반드시 사전 협조요청을 해 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번 파장이 단순 해프닝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시각도 적지 않다. 럼스펠드가 느닷없이 미군감축(철수)을 거론한 것은 '노무현 당선자에 대한 기선제압' 과정에서 나온 과잉 제스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정호기자 azure@hk.co.kr
■정부·盧측 "무슨 소리" 겉으론 부인, 내심 긴장
대통령직 인수위와 정부 각 부처는 7일 미국측이 주한미군의 단계적 감축 의사를 전달했다는 보도를 입을 모아 부인하면서도, 결국은 한미간 현안으로 부상한 것으로 보고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 등을 면담한 민주당 정대철(鄭大哲) 최고위원은 "주한미군 철군 또는 감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고, 국방부는 즉각 "한미 양국은 단 한번도 논의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외교부 당국자도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따라 주둔기지를 재배치하는 등 한미동맹의 미래를 논의하자는 원론적 얘기"라면서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은 미 정부 인사들이 그 동안 여러 채널을 통해 "한국이 원할 경우 주한미군을 철수 또는 감축하겠다"는 견해를 전달해왔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않고 있다. 공개적으로 언급한 주한미군의 재배치 문제가 사실상 지상군 감축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신중한 태도는 주한미군 감축 문제가 북한 핵 문제 및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개정 등과 복잡하게 얽히면서 대미관계 전반에 악영향을 줄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정부 일각에서는 노무현 정부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적인 '화법'때문에 주한미군 감축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분석도 내놓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주한미군 재배치는 1989년 넌―워너 수정안 이후 미국의 일관된 방침이었다"면서 "문제는 북한 핵 문제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데다, 새 정부 출범이 임박한 시점에 이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아도 한미관계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노 당선자 측도 자못 긴장하고 있다. 인수위는 일일 브리핑 자료에서 "한미 우호관계의 틈을 벌릴 수 있는 보도가 나오고 있어 안타깝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당선자 측 한 관계자는 "대북 4,000억 비밀송금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 문제까지 부각되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미공조에 큰 혼란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주한미군 재배치는 국가 안보적 사안일 뿐더러, 엄청난 비용이 수반되는 문제여서 새 정부가 쉽게 응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향후 한미간 논의의 초점은 방위력을 최소한 현재 수준 이상으로 확보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면서 "단순 숫자상 병력의 문제 보다는 총체적 개념의 전력을 유지·강화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