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광장시대인가. 그렇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광장으로 나온다. 광장에서 자신을 확인하고 우리를 발견하고 여론을 배양하며 변화를 실감한다. 지난 해 6월 월드컵열기 속에 학습된 '광장행동'은 이제 새로운 풍경으로 정착했다. 광장에 어울리는 색깔은 역시 붉은 색이라는 생각을 다시 갖게 해준 월드컵 이후, 반미 촛불시위나 대선 당선축하판이나 반미반대집회가 계속 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광장이 따로 없다. 대중이 모인 곳이 곧 광장이다.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인 우리의 전통적인 사전에 광장은 동원과 여론 조작과 우중(愚衆)의 장소였다. 광장에서 펼쳐지는 각종 집회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갖춘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머릿수만 중요한, 획일적 이념과 프로파간다의 무대였으며 정부는 광장이라는 확성의 공간을 통해 국론을 만들어왔다. 사람들의 손은 무엇인가를 환영하거나 박수치고, 만세를 부르거나 선서하고 주먹질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였을 뿐이다. 그랬던 우리의 광장이 어느 새 의사소통을 꾀할 수 있는 공통의 장소라는 개념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광장의 대척적인 개념은 밀실이다. 광장이 공동체적 삶의 공간이라면 밀실은 개인적 삶의 공간이며 광장이 객관적 장소라면 밀실은 주관적 장소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요,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라는 말은 두 공간의 특성과 모순을 일깨워 준다. 4·19에 의해 조성된 민주공간에 발표됐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은 광장과 밀실의 대비를 통해 분단국 지식인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남한과 북한은 모두 광장이면서 밀실이었다. 그래서 '광장'의 이명준은 제3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의미를 떠나 순수한 의미에서의 밀실은 인간 생존의 조건이자 창조의 공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밀실을 원한다. 마레크 플라스코의 소설 '제8요일'의 연인들은 단 하루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덟번째 요일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들만의 방을 간절하게 원한다. 앙리 바르뷔스의 소설 '지옥'에 등장하는 남녀는 여관방이라는 밀실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하염없는 쾌락 추구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우리 사회에는 비디오방 PC방 전화방과 같은 밀실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많다. 그런 곳들은 대부분 퇴폐와 불륜, 향락의 공간이 되고 있지만 그것만이 밀실의 전부는 아니다.
밀실에서 이루어진 일은 바로 광장에서 펼쳐지며 대중 앞에 노출된다. 광장과 밀실의 경계를 여지없이 허문 것은 인터넷이다. 인터넷이 사용되는 사적 공간은 이미 광장의 일부가 돼버렸다. 인터넷이라는 광장에서 들끓거나 지지고 볶아진 것들은 금세 현실의 광장으로 나온다. 여론 유포와 전파의 위력에서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당할 자가 없다. 노무현 당선자가 국민여론을 수렴하려 하고 참여와 토론을 강조하는 것도 인터넷의 힘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이내 공개되고 햇빛 속에 드러나는 이 광장시대에도 밀실적 행동과 문화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밀실이 보장하는 익명성과 불특정성을 이용해 사이버 상에 대선 개표조작설과 같은 허위사실을 퍼뜨리거나 근거없는 인신공격과 무고를 하는 일은 아직도 많다. 사회적 속도와 문화적 속도가 제 각각이다.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과 정부도 마찬가지다. 몇몇의 사적 이익을 위해 중요한 사항을 밀실에서 결정하거나 각종 법령을 어겨가며 대북송금을 하고도 진상을 밝히지 않는 것은 밀실수준의 행동이다.
앞에서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라는 말을 인용했지만, 광장에 모인 대중에서도 밀실행동이 발견된다. 정론과 거리가 먼 주장이나 상식선을 넘는 행동은 공공의 장소인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도 집합과 다중의 힘을 업은 밀실행동의 변형일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순수성과 진정성을 지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시대다. 모든 것이 곧바로 상업화하고 레저화하는 시대가 아닌가. 밀실 속에 광장이 있지만, 광장 속에도 수많은 밀실이 있다.
임 철 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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