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문화발전소를 찾아서]<3>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문화발전소를 찾아서]<3>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입력
2003.02.07 00:00
0 0

연구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이하 수유)를 찾아 가려면 번잡스러운 서울 대학로를 헤쳐야 한다. 4일 저녁 7시, 소극장 '삐끼'들이 공연 30분을 앞두고 손님 끌기에 열을 올리고, 서둘러 맛집을 찾는 연인들로 붐비는 길을 따라 수유에 도착했다. 방송대에서 멀지 않은 대학로 뒷길의 6층 빌딩이다. 뜻밖에도 연구실은 어수선했다. 정확히 말하면 연구실이 아니라 수유 회원이 식사를 하는 식당 겸 카페 '트랜스'(Trans)는 저녁 식사를 막 끝낸 사람들이 한담을 즐기느라 약간 소란스러웠다. 대학의 동아리 방 같은 냄새가 물씬했다. 겨울 강좌의 하나로 회원 류준필(37)씨가 강의하는 '유교 담론과 공·사(公·私) 개념의 변용' 수업이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이곳은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수다(數多)한 지식을 이해하고 가공해 우리 식으로 소화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그저 공부 좀 더 해 보자고 모인 건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경쟁이나 대립, 화폐나 가치의 법칙을 넘어, 상쟁(相爭)이 아닌 상생(相生)의 관계를 삶으로 실천하는 곳입니다." 수유의 맏형 노릇을 하고 있는 이진경(40)씨의 설명은 다소 현학적이었다.

"공부하고 싶을 때 나와서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책 읽고 글 쓰고, 같이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있으면 발제한 뒤 동조자를 규합해 1년 정도 세미나하고, 끼니마다 주방에서 같이 밥 지어 나눠 먹는 곳입니다. 공부를 매개로 한 생활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트랜스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카페 마담' 문성환(33)씨의 말이다.

수유는 1997년 7월 수유리 강북구청 옆 사무실에서 처음 닻을 올렸다. 대표인 고미숙(43)씨가 회원 권보드래(34)씨와 함께 연 '계몽기 신문세미나'가 출발이었다. 그 해 겨울 고병권(31), 이진경 등 서울사회과학연구소(서사연) 연구원들과 함께 공부하다가, 2년 뒤 서사연 회원들이 만든 '연구공간 너머'와 합쳐 대학로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빌딩 4, 5층 전부, 합쳐서 약 120평의 공간을 임대해 위는 연구실, 아래는 카페와 강의실로 쓰고 있다.

수유는 흔히 대안 학문공동체라고 불린다. 대학 등 이른바 제도권 학문 공간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여기 모인 사람들이 탈학교를 주장하는 '안티'인 것은 아니다. 대학 일자리를 찾다가 지쳐 대학 아니면 공부 못 하나 하고 생각을 굳힌 쪽이다.

30대 초반의 대학원생이 주축인 수유의 회원은 현재 50여 명. 공부만 같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솥밥 먹는 식구들이다. 이들은 우선 세미나를 통해 지식을 공유하고 넓힌다. 다달이 1만 원씩 내고 참가하는 세미나는 주제에 따라 외부인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지금은 '노마디즘' '불교' '문화사' 등을 주제로 30개 가까운 세미나를 열고 있다.

수유의 또 다른 지식 보급 수단은 강의다. 99년 처음 시작한 일반인 대상 공개 강좌는 주로 세미나의 성과를 반영한다. 지금은 강좌 기획팀까지 생길 정도로 체계화했다. 지난달 4일부터 시작한 2003년 겨울 강좌는 회원들이 강사로 나선 일반강좌가 10개, 정민 한양대 교수, 한국 사학자인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등이 강사로 초빙된 특별 강좌가 3개이다.

세미나와 강의 결과는 이내 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회원들이 함께 낸 책은 '들뢰즈와 문학-기계'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book+ing 책과 만나다' 등 4권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앞으로 출판사 그린비와 공동 기획, 총서 형태로 낼 '고전 다시 쓰기' 시리즈. 사회학을 전공했으면서 니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고병권씨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시작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 마르크스의 '자본', 플라톤의 '국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이 줄줄이 나온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원전 풀어 쓰기가 아니라 다양한 사유의 틀을 적용해 고전을 곱씹어 낸 수유의 중요한 성과물이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수유 사람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삶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진경씨가 꿈꾸는 것은 연구자 코뮨(공동체)이다. 근대가 낳은 무한 경쟁의 틀에서 벗어난, 이해와 배려가 넘치는 생활 공간이다. 그래서 수유에서는 함께 나누는 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기자에게 고미숙씨는 "다음에 올 때는 꼭 밥을 먹고 가라"고 권했다. 홈페이지 www.transs.pe.kr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