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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의 컷]촌스런 멜로의 필수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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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의 컷]촌스런 멜로의 필수조건

입력
2003.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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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드세요." 여자가 남자에게 삶은 달걀을 내밀었다. "괜찮습니다." 남자의 거절에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시면 제 손이 부끄럽잖아요." 80년대 언젠가, 고속버스에서 이 말을 듣고 터지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여자의 말은 당시 멜로영화(주로 성우 고은정의 목소리)에서 늘 들려오던 그 대사와 말투였다. 만일 여자가 "야, 그럼 나 혼자 한 줄 다 먹니"라고 했더라면 그건 멜로영화가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엽기 코미디.상황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우스웠던 것은 여자가 너무나 진지하게 상투적인 말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상투(常套)란 '보통으로 하는 투'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지만 우리 생활에서 '상투'란 자극에 대한 반복되는 반응 양식이다.

'촌스러운 연애담'을 만들 때 필수 요소 몇 가지. 일단 처음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든 연락처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곧 '우연히' 만나게 돼 있다. 여학생은 몸이 좀 약해줘야 한다. 소나기를 철철 맞은 다음날 약속 장소엔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콩나물 국에 고춧가루를 확 풀어먹으니 거뜬하네." 이렇게 나오면 다음 얘기가 진전이 안 된다. 비 올 때는 주변 500m내에 원두막이 있어야 한다. 달리다 한 번 정도 넘어지면 고맙고. 남자가 업어주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 무겁지…." 그리고 남학생은 반드시 아무 거라도 벗어줘야 한다. "야, 어차피 너도 젖고 나도 젖는데, 젖은 옷 벗어주면 뭐하냐. 무겁기만 하지." 섬유의 함수(含水)율을 계산, 이런 '과학적' 멘트를 날리면 바로 '짤린다'. 이별은 편지로 통보한다. "내가 어디에 있든, 누구와 살아가든 너를 잊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에 더해 그가 준 선물을 반송하면 효과 두 배.

하지만 노련한 상투는 비웃음을 상쾌한 웃음으로 바꾼다. 영화 '클래식'은 상투적 설정이라는 무늬를 학창시절이라는 아련한 배경으로 '커버'함으로써 상투를 '복고 상품'으로 만들었다. 60, 70년대 방학을 맞아 시골 친척 집을 가보지 않은 이는 별로 없고, 그래서 낯선 동네에서 뜻밖의 연애담을 기대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30대나 40대는 영화에서 상투 대신 추억을 읽는다. 물론 '클래식'하다는 것이 '엽기(적인 그녀)'나 '색(즉시공)'에 비하면 역시 상업 코드로서의 파괴력이 약한 것은 첫 주말 관객 스코어(4위)에서 입증됐다. '짱(짜증)난' '클래식'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역시 고은정 목소리로) "아이, 이러시면 싫어요"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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