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정치권이 5일 대북비밀지원 사건과 관련,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직접 해명을 요구한데 대해 김 대통령이 이를 사실상 거부함으로써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도 김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방안을 거론했지만 김 대통령은 이 같은 기류에 즉각적으로 강력한 제동을 건 셈이다.김 대통령이 직접 밝힌 거부 이유는 "남북간에 진행된 일을 모두 공개하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김 대통령이 이번 사건이 터진 직후 현대상선과 북한과의 거래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 것과 같은 기조다. 김 대통령은 또 대북 사업에서의 현대의 역할과 성과를 강조함으로써 북한에 지원된 자금을 일종의 '평화비용'으로 생각하는 인식을 드러냈다. 김 대통령이 "남북관계라는 초법적 범위의 일을 우리의 법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대목에는 정치권에서 거론되고 있는 특검제 실시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반영돼 있다.
이 같은 공식적인 이유 이외에도 김 대통령이 정치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강수를 둔 데에는 "정말 말 못할 고민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대북비밀지원 사건의 전모가 낱낱이 밝혀질 경우 이미 북한에 건네진 자금이나 투자가 원인 무효가 돼 허공에 떠 버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이날 "이번 사건에 대한 특검은 현대 보고 죽으라는 얘기"라고 말한 데서 이런 고민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현대가 쓰러질 경우 향후 대북 사업은 거의 원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우려가 짙게 배어 있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안에서는 "김 대통령이 지금의 원칙적인 입장에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현재 정치권이 워낙 가파르게 대치하고 있어 어떤 카드로도 쉽게 상황을 진정시킬 수 없는 점이 오히려 김 대통령의 선택의 폭을 좁게 만들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금 해명을 해도 4월 재보선, 더 나아가 내년 총선을 의식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정치 공세를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김 대통령으로선 일단 강수를 둠으로써 기세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한다"는 해석이다.
김 대통령의 이날 발언이 이처럼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역으로 여야의 논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적절한 시기에 추가적인 진상 공개 또는 사과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가능하다. 이는 국회 과반 의석을 갖고 있는 한나라당이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특검제 실시가 불가피한 만큼 김 대통령이 이에 대비해 단계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분석과 연결돼 있다. 실제 한나라당 인사들은 "김 대통령이 모든 것을 전부 공개하는 것은 국익에도 남북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대목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완전 공개가 아닌 방식, 즉 비공개적으로 추가적인 진상을 밝히거나 해명을 하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해 나가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얘기다.
추가적인 진상 공개 또는 해명의 구체적 방법을 둘러싸고 청와대 안에서는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수는 김 대통령이 악역을 직접 맡도록 해서는 안되며 누군가 이를 대신해야 한다는 쪽이다. 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그러면 누가 총대를 메느냐"는 민감한 문제로 이어진다. 우선 관심의 초점은 야당이 이번 사건의 핵심 관계자로 지목하고 있는 박지원(朴智元) 비서실장과 임동원(林東源) 통일특보가 어떻게 입장을 정리하느냐에 모아진다.
/고태성기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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