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초 실시된 미국 중간선거에 출마한 10여명의 한인 후보들 가운데 당선된 인사는 워싱턴주 상원의원 재선에 도전한 신호범(미국명 폴 신·민주당)씨와 하와이주 하원의원 3선에 도전한 장은정(미국명 실비아 장 룩·민주당)씨 등 2명 뿐이었다.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경제·교육·종교계 등에서 비교적 눈부신 활약을 보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류사회의 핵심인 미국 정계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는 한인 정치인은 눈에 띄지 않는다. 중국·일본계는 이미 연방 상·하원 의원은 물론 주지사와 장·차관까지 배출했지만 워싱턴 정가에 진출한 한인은 연방 하원의원 3선을 역임한 뒤 연임에 실패한 김창준 전 의원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도 불법 선거 헌금 문제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고 말았다.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신의항 교수(사회학)는 이를 미국 주류사회 내부에서 매긴 '한인사회의 성적표'라고 표현했다. 경제 분야 등에서의 성공은 개인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일궈 나갈 수 있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공직을 선거로 뽑는 정치 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정계에서의 성공 여부는 한인들의 정치적 단결은 물론 한인들이 미국 사회 내부에 기여한 공헌도, 기부 정도 등에 의해 영향을 받는데, 한인 사회는 이 분야에서 거의 낙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2000년 조사에 따르면 한인들은 유럽계 등 약 20개 이민집단 가운데 소득수준이 중상위 그룹에 올라 있지만 정작 조세부담에는 인색한 편인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현재 한인이 운영하는 13만5,571개 사업장의 연간 매출액이 469억 달러에 달하지만 탈세와 탈루가 비일비재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인 납세 의무마저 성실히 이행하지 않은 채 주류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 미국 사회에서 형성된 한인 네트워크가 너무 내부 지향적이어서 주류사회로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은 말할 것도 없고 미주 지역 어느 곳이든 한인회는 물론 향우회, 동문회, 참전동지회, 세탁업협회, 재미과학기술자협회 등 숱한 단체가 조직돼 있다. 하지만 이들 단체는 사적 이해 관계나 친목단체 수준에만 머물러 있을 뿐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LA총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미국에 살면서도 늘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오늘을 살기에 급급, 주류사회 진입은 엄두도 못내는 현실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미연합회'(KAC)의 찰스 김 사무국장은 "한인이 정치를 하려면 한인타운을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인 후보가 한인 유권자 표로 당선되려면 한인 인구가 선거구 내에서 절반을 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인구구성을 갖고있는 선거구는 없다"며 "따라서 한인 정치인이 당선되기 위해서는 한인 커뮤니티가 아닌 지역사회에서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1992년 로스앤젤레스(LA) 흑인 폭동 사태는 한인 사회에 엄청난 고통을 남겼지만 한인들이 지역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폭동은 한인들에게 "한인들이 정치분야에 진출해 정치적인 발언권을 얻지 못하면 한인사회는 영원한 약자로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후 한인 단체는 정치인들의 후원회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고 교민행사에 주류사회 인사는 물론 타 인종을 초대하는 등 지역사회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한미연합회를 중심으로 한인 커뮤니티의 정치적인 힘을 증대시키기 위한 노력에 나서고 있다. 물론 한인 정치인을 당장 의회에 진출시키기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여기에는 아직 많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들은 우선 적극적으로 의회 보좌진 활동 참여를 통해 정치적인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찰스 김 사무국장은 "미국은 개인이 아닌 커뮤니티의 역량이 경쟁하는 사회"라며 "한인 커뮤니티가 단결된 힘을 과시하고 한인 1.5세대나 2세대들이 적극적인 의회 활동을 통해 정치적인 기반을 형성해 나간다면 향후 10년 이내에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kimin@hk.co.kr
■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부의장
신호범(愼昊範·미국명 폴 신·67·사진)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은 워싱턴주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워싱턴주에서 아시아계를 뜻하는 비속어인 '오리엔탈(Oriental)'을 퇴출시키는 등 한인은 물론 미국내 소수 유색 인종의 권익 보호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신 의원은 지난 1월7일 한인사회의 대변인 역을 맡아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쳐온 공을 인정받아 한국외국어대(안병만·安秉萬 총장)에서 명예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취득은 2년 전 김현욱(金顯煜) 전 국회의원의 소개로 외대에서 강의를 맡은 게 계기가 돼 이뤄졌다.
1998년 동양계 최초로 워싱턴주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주상원 부의장까지 오른 그는 지난해 11월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 한인 동포들의 위상을 드높였다. 6세 때 가출, 거리를 떠돌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그는 19세때인 1955년 미국으로 입양됐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미국사회에서 소수민족의 입양아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그는 2001년 한국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주 상원 부의장에 올랐고, 지난 1월1일 LA에서 열린 로즈퍼레이드 행사에서는 100년 한인이민사를 빛낸 '9명의 영웅'에 뽑히는 영광까지 안았다.
"1955년 9월 부산항을 떠날 때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으리라 다짐했지요. 하지만 정작 나를 지탱해준 것은 한국인으로서 정말 지기 싫다는 오기였습니다"
신 의원에게 한인 이민 100주년은 또 다른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100년전 한인들이 하와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와 비교하면 눈부신 발전을 이뤘지만 미국 주류사회로의 진출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그는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1.5, 2세대 일부가 주류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부모의 가업을 잇겠다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탄식했다.
신 의원의 마지막 꿈은 차세대 지도자 양성이다. 31년간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던 경험을 살려 그는 4년전부터 미국 50여개 주에서 후진 정치인 양성을 위한 '한미정치교육협회'를 운영하고 있다. 주위에서 연방 하원이나 주지사 선거에 도전하라고 권유하고 있지만 한인동포 2세들의 미 정계 진출에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을 계획이다.
신 의원은 "레이건 전 대통령,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 전 수상도 한때 영국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의 이민 2세였다"며 "한국계 미국 대통령이 나오는 순간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KAC·영카도니… 한인1.5·2세대중심 정치력 신장 활동
한인 1.5, 2세대를 중심으로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한미연합회(KAC)로, KAC는 유권자등록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하려면 유권자로 등록해야 하는데, 한인 시민권 취득자 중 유권자 등록을 하는 사람은 전체의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2000년 KAC가 대대적으로 유권자등록운동을 펼친 이후부터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덕분에 지난해 9월 뉴욕 퀸스 카운티에서는 한글로 된 유권자등록 용지가 처음 배포되는 성과를 올렸다. KAC 4·29센터 존 유(42) 소장은 "한인들이 뒤늦게나마 미국에서 사는 법을 체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KAC는 또 미국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대인위원회(AJC)를 모델로 삼아 조직개편에 나서고 있다. KAC의 전미 조직화 구상에 따르면 사무총장 중심의 강력한 네트워크를 구성, 워싱턴DC 등 동부지부는 정계 로비 등 정치적 신장을,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부는 교포 권익 실현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밖에 지난달 30일에는 뉴욕주에서 활동하는 민주당 의원의 한인 보좌관들이 한인 정치가 배출을 위한 단체를 조직했다. 마크 와프린 뉴욕주 하원의원의 론 김 보좌관, 브라이언 맥라글린 하원의원의 진 김 보좌관, 베리 그로덴칙 뉴욕주 하원의원의 세나 박 보좌관 등은 영카도니(Young KADONY·Korean American Democrat of New York)란 명칭으로 모임을 갖고 앞으로 이 모임을 한인 정치 단체로 키워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은 앞으로 한인들의 정치력 향상을 위해 각종 워크숍 및 홍보 활동을 가지며 한인 정치가 배출을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간다.
/로스앤젤레스=김기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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