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김대중 정부 출범 때의 일이다. 김대중 정부는 대선 전에 합의한 DJP 연대에 의해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김 총재의 전력을 문제 삼아 총리인준을 거부함으로써 여야관계는 정권 초기부터 꼬이기 시작해 5년 내내 갈등과 반목을 반복해 왔다.이 같은 여야관계는 김대중 정부만이 아니라 한나라당에도 결국 타격을 주고 말았다. 즉 총리인준거부 등은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와는 별개로 한나라당이 정략적으로 정부의 발목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국민에게 주었고 이는 지난 대선에서 낡은 정치 청산을 내건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승리에 적지 않게 도움을 줬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는 여야가 무언가 다른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국민이 희망을 갖게 했다. 우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여야 총무를 만나 국정 운영에 국회의 협조를 당부하는가 하면 야당 당사를 직접 방문하는 파격적인 정치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한나라당도 화답하듯 노 당선자의 국정 운영에 협조할 것이 있으면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은 이제 3김 시대가 끝나더니 정치도 새로운 상생(相生)의 정치로 바뀌는가 보다 하고 오랜만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 이 같은 밀월도 잠시일 뿐 노 당선자가 취임도 하기 전에 노 당선자식의 새로운 정치가 깨어지고 여야가 또 다시 정면충돌로 내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었던 현대상선의 대북송금문제에 대해 노 당선자측이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중에 털고 가라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 이 문제가 전면적인 쟁점이 되면서 여야간의 입장이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노 당선자가 모든 국민적 의혹사건에 대해 엄정수사를 촉구하던 입장에서 후퇴해 진상규명이 필요하지만 진상규명의 주체와 절차, 범위 등을 국회가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고 밝히고 나서고 이에 검찰이 수사유보 방침을 발표하자, 한나라당은 검찰총장에 대한 탄핵소추와 특별검사법안 발의 등 강경대응으로 맞서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여야의 주장에는 모두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여야가 부딪칠 때면 즐겨 쓰는 가장 쉬운 판단법은 민주당 조순형 의원의 태도를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개인적 관찰에 의하면 그가 현실 정치인 중 당리당략을 넘어 원칙에 가장 충실한 의원이기 때문이다.
대선과정에서 노 당선자를 지지했고 여권 내 신주류 리더 중의 한 명인 조 의원은 정치적 합의로 의혹을 처리하자는 여권의 분위기에 대해 납득할 수 없는 말이라며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당시 대북지원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떳떳했다면, 이 문제가 불거졌던 지난 해 김대중 정부가 솔직하게 진실을 밝히고 국민의 이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대통령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회 증언을 통해서까지 북한에 단 1달러도 주지 않았다고 사실상 국민을 속여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대북 송금설을 인정할 경우 생길 대선에의 악영향을 고려해 우선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고 판단한 것이었고, 선거에서 일단 노 당선자가 당선됐으니 그 전략은 성공한 것인가?
어쨌든 여야가 지혜를 모아 진상을 밝힘으로써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면서도 동시에 남북관계에 입히는 상처를 최소화하는 솔로몬의 해법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이번 사건의 해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렵게 마련한 건설적인 여야간 대화정치 분위기가 다시 깨어지는 사태를 막는 것이다.
손 호 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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