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한 사랑 노래' 하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그러나 그 감정은 마음을 참담하게 헤집는다. 잔인하게도, 마음의 어느 한 쪽을 들어낼 때도 있다.사랑은 한밤의 도적처럼 온다. 그래서 시인 황동규(65)씨의 열두 번째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문학과지성사 발행)는 '사랑에 기댈 때도 있었다'로 바꿔 볼 수도 있다. 그는 짧은 한 문장을 '시인의 말'로 적었으며 3년 만에 펴내는 시집 제목으로 삼았다.
새 시집에서도 시인은 여전히 사랑을 노래하고 여행을 떠나며 지인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리고 삶을 시어에 비추어 본다. 그 삶은 시간과 손잡고 깊어져 간다. 그만큼 이순(耳順)이 훌쩍 넘은 시인의 눈은 높은 곳에 있다. 타박타박 길을 걸으며 쓴 시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가 그렇다. '그냥 길이 아닌/ 가는 길이 되라./ 어눌하게나마 홀로움을 즐길 수 있다면,/ 길이란 낡음도 늙음도 낙담(落膽)도 없는 곳./ 스스로 길이 되어 굽이를 돌면/ 지척에서 싱그런 임제의 할이 들릴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길이 된다니, 떠도는 발걸음이 시가 된 것이 그의 시력(詩歷)이라는 것을 알고서도 가늠하기가 아득하다.
시집 '버클리풍의 사랑노래'에서 선보인 조어(造語) '홀로움'이 '우연에…'에서도 이어진다. '외로움을 통한 혼자 있음의 환희'라고 설명한 '홀로움'은, 외로움과 즐거움을 같은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시인의 연륜이 아니고서는 헤아리기 어렵다.
"상상력의 원형은 부활이다. 유일신적 상상력은 일회의 부활이요 다신적 상상력은 다중의 부활일 뿐. 그럼 무신적 상상력은? 허허로운 자기 복제 부활일까." 시인이 전하는 말은 모호하게 들린다. 시인의 상상 속에서 부활한 예수와 불타와 원효와 사두(힌두교의 성인)가 만나서 대화한다. "27년 전 그대는 왜 오른팔을 들었는가?"라고 묻는 예수에게 "나는 오른손잡이요"라고 답하는 사두. "누군가 오른뺨을 때릴 때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는 제자에게 "치는 손은 틀림없이 왼손이겠지"라고 답하는 불타. 나뭇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린 아담과 이브의 그림을 보면서 "선생의 낙원은 빨래가 없는 곳이군요"라고 말하는 원효에게 "그렇다. 지옥은 비누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하는 예수. 시인은 "상상력은 졸아들면서 더 진해진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종교라는 불 위에 올려놓고 달인다. 진하게 맛이 든 상상력은 선문답처럼, 때로는 농담처럼 들린다. 농담 같은 선문답을 시로 옮기는 것은 '졸아들면서 더 진해진' 상상력을 가진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진해 십자가에 매달려 손에 쇠못 박히는 신도를 보고/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예수가 말했다./ "꼭 원숭이 같다고 할까 걱정이구나."/ 참지 못할 아픔에 이 악물고 신도가 물었다./ "허나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이 참 삶이 아니겠습니까?/ "왜 누가 너를 죽이려 했더냐?"'('부활절 사흘 전'에서)
그러나 그는 역시 사랑의 시인이다. '하구(河口)였나 싶은 곳에 뻘이 드러나고/ 바람도 없는데 도요새 몇 마리/ 비칠대며 걸어다닌다./ 저어새 하나 엷은 석양 물에 두 발목 담그고/ 무연히 서 있다.' 사랑이 떠난 자리는 이토록 가볍게 허망하고, 그는 다시 사랑을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욱 따가운 사랑을 찾아 걸어간다. '흘러온 반대편이 그래도 가야 할 곳/ 수평선 있는 쪽이 바다였던가?/ 혹 수평선도 지평선도 여느 금도 없는 곳?'('더 쨍한 사랑 노래'에서)
/김지영기자 kimj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