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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北 비밀지원/서독의 "동방정책"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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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北 비밀지원/서독의 "동방정책" 어땠나

입력
2003.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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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 서독은 동독에게 수많은 계기를 통해 천문학적인 돈을 주었다." 노무현(盧武鉉)대통령당선자측의 한 고위관계자는 최근 2억달러 대북 비밀지원사건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 정권의 '동방정책'을 시작으로 30년가까이 중단없이 계속된 서독의 대 동독지원은 우리의 '햇볕정책'을 통한 대북지원과 내용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특히 이번 대북비밀지원과 서독정부의 지원방식은 투명성, 지원의 명분 및 내부 합의과정 등에 뚜렷하게 대조된다.

지원 규모·내역

서독 정부와 우리 정부의 지원은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동방정책을 본격 추진하면서 1990년 통일 직전까지 정부차원 268억5,000만 마르크, 민간차원 748억 마르크 등 1,044억5,000만 마르크(약 520억달러, 62조4,000억원)를 동독에 지원했다. 우리의 정부차원 대북지원은 누계로 4억달러를 넘는 수준이다.

지원된 형태도 다양하다. 서독정부는 주민들이 동독을 방문할 때 지급하는 통행료와 도로사용료 등 178억마르크를 정부 재정으로 지불했고, 서독을 방문할 경우 방문환영금을 지급하는 데에도 25억마르크를 사용했다. 서독정부는 또 은행을 통해 19억5,000만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고, 민간기업의 교역 적자를 충당하는 데에도 74억마르크를 지출했다.

투명하고 제도화한 지원방식

서독정부는 동독정부·주민에게 현금·물자를 지원하는 데에 있어서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지원방식을 '제도화'하는 한편 모든 업무 추진 내용을 사후에 공개했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동독에 대한 지원과 교류·협력의 법적 근거를 확보했다. 모든 동독과의 모든 협력사업은 정부차원에서 주관했고, 특히 현금이 지원될 경우 민간기업일지라도 반드시 중앙은행을 거치도록 해 '뒷돈 거래'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물론 서독정부는 정치범 석방과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반대급부 등 민감한 문제의 경우 공개적인 합의 대신 '비밀거래'를 택했지만 종교단체 등을 통해 정부예산을 활용하고 사후에는 모든 사항을 의회에 공개했다. 또 동독지역 통행료와 도로사용료 지불을 법제화함으로써 현금지원의 투명성을 높였고, 동독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민간기업의 적자를 재정으로 충당하는 데에서도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조건없는 지원은 없다.

서독정부의 동독 지원은 철저하게 조건부로 이뤄졌다. 동독정부가 구체적인 조치를 취하면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다. 지원된 현금과 물자가 동독주민들의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도록 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령 은행을 통한 재정 차관을 제공하면서 동독정부에게 국경에서의 여행 규제완화와 총격사살 행위 금지를 조건으로 제시해 관철시켰다. 또 80년대 이후에는 모든 지원협상에서 환경·문화·교육분야의 회담 개최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 같은 방식을 통해 정치범 석방과 이산가족 상봉문제에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 1989년까지 34억5,000만마르크 상당의 물자를 지원하는 대신 3만4,000여명의 정치범을 석방시켰고, 50억 마르크를 지원하면서 25만여명의 이산가족을 재결합할 수 있도록 했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 83년 동·서독 비밀교섭 사례

1982년 여름 샬크 골로드코브스키 동독 대외무역부 차관은 극비리에 프란츠―요제프 슈트라우스(1915∼88년·사진) 서독 기사당(CSU) 당수의 집을 찾았다. 국가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서독의 대표적인 우파 반공주의자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당시 유럽의 정세는 최근 한반도 핵 위기에 비견될 정도로 험악했다. 미국은 중거리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를 결정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골몰하던 소련은 즉각 동유럽 일대에 대응 핵 미사일을 증강 배치했다. 서독 정부는 미국의 눈치를 살피며 동방정책의 속도조절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정부 및 사민당 등과 협의한 뒤 대동독 밀사 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정세가 사나웠던 만큼 내부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면서 인적·통신 교류확대, 국경지역 총격 사살행위 금지, 미개척 분야였던 환경·문화·교육 회담 재개 등 까다로운 협상개시 전제 조건들이 첨부됐다.

동독이 고민 끝에 체제유지에 역풍으로 작용할 게 뻔한 이 조건들을 수락하자 그 해 가을부터 정부간 차관보증 협상이 시작됐다. 서독 내 외국계 은행이 주축이 된 컨소시엄이 구성됐고 83년 6월 10억 마르크 등 총 19억5,000만 마르크(약 1조2,000억원)가 지원됐다. 5년 이후 분할 상환에 이자도 리보+0.1%이어서 특혜 시비가 있을 수 없었다. 슈트라우스는 이를 두고 "실용주의가 전쟁을 막았다"고 말했다.

세종연구소 백학순(白鶴淳)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서독 정치인들은 이념적 성향이 다르더라도 동독의 현실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공유했다"면서 "정치적 합의의 과정이야말로 평화와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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