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58) "남산에서 보잡니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모나미 인생 송삼석 (58) "남산에서 보잡니다"

입력
2003.02.04 00:00
0 0

9, 10, 11, 12대 의원을 지낸 K 전 의원은 내 절친한 친구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보니 유독 호남 출신 학생들만 정기적인 모임이 없었다. 그저 안면 있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인지 K 전 의원과 나는 자연스럽게 호남 학생들의 모임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전남 출신인 K 전 의원과 전북 출신인 내가 모임을 주선하게 됐다.K 전 의원은 두주불사에 호방한 성격을 지닌 호걸풍 인사다. 그 시절 나 역시 술을 마다하는 처지가 아니어서 우린 금세 의기투합했다. 졸업을 한 후에도 K 전 의원은 야당 정치인으로서, 나는 기업인으로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지금도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 K 전 의원이 정계에 입문하기 전부터 우린 거의 일주일에 2,3번은 만나 술잔을 주고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유신 때인 70년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동남아 지역으로 수출을 갔던 나는 현지 공항에서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도 알려줄 겸, 회사 사정도 궁금해서 걸었던 전화였다. 마침 전무가 전화를 받았는데, 전화 받는 목소리가 이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산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회사에 찾아왔다가 내가 출장 중인 것을 알고 돌아가면서 귀국하는 나를 공항에서 연행한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남산이라면 중앙정보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탈세 사건의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기업을 하면서 특별히 부정한 일을 저지른 적도 없고, 언제나 올바르게 기업 활동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나인데, 간첩 잡는 일을 하는 '남산'에서 나를 연행하겠다니 도저히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항에서 순순히 연행될 수는 없었다. 나는 전무에게 "무슨 수를 쓰든 간에 남산에서 왔다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서 내일 아침 10시에 사무실에서 보자고 하라"고 지시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집에서 쉬는 동안에도 나는 궁금증이 더해갔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졌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공항에서 바로 연행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겁낼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오전 10시, 약속한대로 남산 사람들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나는 우선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고, 그들은 붉은 선 두개가 그어진 신분증을 보여줬다. 사실 그게 진짜 신분증인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본 적도 없는데다 워낙 빨리 꺼냈다가 집어넣었기에 뭐라고 씌여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남산 사람들은 대뜸 "K 의원 잘 아시죠"라면서 "기업 하시는 분이 야당 의원을 그렇게 자주 만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순간, '아 야당 인사 비리 캐기를 위한 내사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전에도 K 전 의원이 술자리에서 "내가 야당 인사가 되니까 주변 사람들이 술자리를 기피하고 슬슬 멀리하려 하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린 뒤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것 보시오. K 의원과 나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요. 친구끼리 술을 마시는 것도 죄가 됩니까. 그렇소. 당신이 알고 있는 대로, 나 K 의원과 자주 만납니다. 일주일에 2, 3번은 만나 술 마십니다. 그 친구가 정치하기 전부터 그랬소. 친구가 야당 의원이 되면 친구를 버려야 합니까. 당신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소. 당신들이 뭐라 하든 나는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K 의원과 자주 만날 거요."

며칠 뒤 만난 K 의원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 때문에 자네까지 몹쓸 일을 당하네 그려. 미안허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야당 인사들이 고초를 겪던 시절의 이야기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