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수목드라마 '눈사람' 촬영 첫날, 이창순 PD는 김래원(22)에게 말했다. "넌 멋만 부리고 그냥 카메라 앞에 서 있기만 하면 돼.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부담을 덜어 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말이지만 김래원에게는 "솔직히 말해 자존심을 긁어 놓는, 온몸에 경련이 일게 하는 말"이었다.'차세대 톱스타 후보' 리스트마다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그도 데뷔한 지 벌써 7년째. "7년이나 됐다구요?"라고 듣는 사람이 반문할 만큼 그는 신인티를 벗지 못했다.
"아직까지 저는 그냥 잘 차려 입고 카메라 앞에서 폼이나 잡는, 좀 괜찮게 생긴 젊은 탤런트 이상은 아니었던 거죠.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이 PD의 말은 김래원에게 엄청난 자극이 됐다. '눈사람'에서 김래원은 달라지고 있다. 형부 필승(조재현)에 대한 연욱(공효진)의 사랑이 커질수록 연욱을 사랑할 수 없는 불행을 담아내는 김래원의 연기도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데뷔 이후 '학교2'(KBS 1), '순풍산부인과'(SBS), '내사랑 팥쥐'(MBC), 영화 '청춘' 등을 거치면서도 그저 잘 생긴, 잠시 뜨다 말 배우처럼 느껴지던 그도 이제는 "연기에 탄력을 받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처음 캐스팅됐을 때만 해도 성준은 그냥 구색 갖추기 배역쯤으로 느껴진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욕심이 커졌다. 배역의 비중도 커졌다.
요즘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애늙은이처럼 행동한다. "죄송해요, 20대 후반의 돈 많은 집 아들 성준이를 연기하려다 보니 하루 종일 성준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느라 '좀 거만해졌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예요"라고 필요 없는 사과까지 할 정도다.
하지만 "요즘 뜨더라"는 말에는 담담한 반응이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제 팬클럽 홈페이지에도 잘 안 들어가요. 소심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남들이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산만해 질까 봐서요."
그러나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를 칭찬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방송 초기 게시판을 장식했던 '연욱과 필승이 연결돼야 한다'는 말은 어느새 쑥 들어가고 시청자 의견란은 성준과 연욱의 해피엔드를 바라는 글이 가득하다. '성준 역에는 김래원이 딱'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이런 반응을 전하자 그제서야 "그래요? 갑자기 너무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들어가 봐야겠네요"라고 말한다.
이제부터가 고민이다. "앞으로는 성준 역을 표현해 내기가 더욱 힘들어 질 것"이라고 걱정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연인을 알게 됐을 때만큼 절망적일 때가 또 있을까.
"열병으로 입원한 연욱에게 물을 떠다 주고 가습기 습도를 조절해 주고 죽도 사다 주며 뜬구름 같은 행복을 잡고 있는 성준도 연욱이 사랑하는 상대가 형부 필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변해야 할 거예요. 그럴 때 그 애증을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죠."
김래원은 "아직 한 번도 긴 시간 동안 한 사람을 가슴에 담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준의 심정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그 답답함은 커진다. 호텔 회장 아들로 특기자든 뭐든 대학도 나왔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사업도 하고 있는 성준이 왜 부모 없이 자란 데다 대학도 안 나오고 직업은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말단 순경인 연욱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물론 스무살을 전후해 사랑도 해 봤죠. 하지만 그 때는 좋으면 좋고 헤어져도 누군가 또 만나겠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어린애가 장난감 갖고 싶어 안달하는 듯한' 감정이었죠. 하지만 애정의 절제라고 할까요? 겉으로는 심장에 피가 안 흐르는 척하고 있지만 깊은 사랑을 안고 사는 성준 역을 제대로 소화하고 나면 정말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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