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포넨시스(Nipponensis)'라는 단어가 있다. '일본에만 있는, 즉 일본 고유의' 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서구의 학자들이 '일본 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1980년대 유행했던 '일본 이질론(異質論)'의 변형인 셈이다.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연초부터 이것을 주제로 15회에 걸쳐 장기 특집 기획물을 게재했다. 이 병의 원인 및 증상은 크게 네 가지다. 말만 앞세우고 개혁은 실행하지 않는 미루기 중독 현상, 정치 경제 사회 등 각종 시스템의 경직화, 안이한 현실 인식 등 위기 의식의 결핍, 실패를 두려워하는 리스크 과민 등이다. 특히 정치가와 관료의 희박한 위기 의식의 예로 지난해 5월 고이즈미 총리와 퇴임한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디플레이션이 10년 지속된다면 미국에서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크게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본을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쇠약하게 만드는 '일본 병'이 경제와 사회에 침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국민의 정부 5년 정책평가 보고회'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평가위원회는 외환보유액 조기 확충과 4대 부문 구조개혁, 대북 포용정책 등을 주요 성과로 꼽으면서 성적이 전체적으로는 B플러스 이상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이 같은 자평에 대한 평가는 국민들의 몫이지만, 관심을 끄는 것은 향후 과제로 제시된 부문이다. 평가위는 지역 계층 세대간 갈등 및 격차 해소, 성장과 안정을 조화시키기 위한 특단의 대책 등을 지적했다. 외환위기 이후 가장 고통을 많이 받은 계층은 서민층이지만 아직 이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이다.
새 정부는 성장보다는 분배를 우선시하고 있어 이런 향후 과제들은 자연스럽게 인수 인계될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정책에 있어서는 그 쪽 방향으로 많이 치우칠 전망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개혁을 하겠다는 측과 그 대상 사이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분야가 재벌과 노동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달 말 '2003년 경제환경 전망과 과제'라는 보고서에서 새 정부가 도입하려는 집단 소송제나 사외 이사제 강화 등은 기업경영 위축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으며, 지나친 규제는 기업 경영과 투자를 위축시켜 성장 잠재력을 저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각종 재벌 개혁 정책에 대한 반대의사를 명확히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열렸던 한미재계회의에서 미국측은 새 정부의 급격한 개혁 기조에 우려를 표명했다.
노동문제는 올해 가장 큰 이슈가 될 전망이다.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최근 '한국의 재벌 개혁'이라는 책을 발간한 에드워드 그레이엄 미국 국제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한 인터뷰에서 "일자리를 대거 늘리면서도 개혁을 지속하겠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고 말했다.
성장과 분배를 어떻게 조화시켜 노동계의 높아진 요구를 맞추느냐가 문제다. 재벌 및 노동 개혁은 국민적 요구 사항이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개혁이 얼마나 어렵고 성공하기 힘든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증명됐다. 새 정부측이 우선 해야 할 일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일본같이 될 가능성이 있다.
카이오 코흐 베저 독일 재무장관은 다보스 포럼에서 "미국은 기업 개혁, 일본은 금융 개혁, 유럽은 구조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이 3가지를 모두 이뤄야 한다는 점에서 더 어려운 상황인지도 모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말로만 하는 개혁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변혁을 향해 나아가는 행동력이 요구되고 있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개혁, 말보다는 실행'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처음에는 유력지의 신년호 1면 제목으로는 좀 밋밋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갈수록 가장 핵심을 찌른 제목 같아 보인다. 결국 모든 것은 결과가 말하는 것이다. 이 상 호 논설위원 s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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