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서울 사시는 부모님께 세배도 드리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2001년 중앙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박종민(朴鍾旻·28·경영학과 4년)씨는 이번 설날에도 쓸쓸하게 하루를 소일해야했다. 국가보안법 상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국대학생총연합(한총련) 대의원이라는 이유로 수배된 지 3년. 학교 바깥 구경은 커녕 명절 때 집에 다녀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오직 학교 울타리안에서만 자유가 보장된다.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은 그에게 너무나 길다. 수배된 동료 학생 2명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중앙대 학생회관. 찬기운이 뼈속을 파고드는 서너 평 남짓한 학생회관 2층 생활방은 옷가지와 낡은 이부자리, 휴대용 버너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1,200원짜리 학생식당 밥으로 매끼를 때우고 세수와 빨래는 화장실 찬물로 해결한다. 아파도 학교 보건소외에는 갈 수가 없다. 학교 바깥에는 500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그를 잡기 위해 경찰이 날카로운 눈을 번득이고 있기 때문이다.
"왜 고생을 사서 할까. 가끔 제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붙잡혀도 두 달정도 옥살이를 하면 집행유예등으로 풀려날 텐데 왜 3년씩이나 생고생을 하냐는 말도 많이 듣죠."
박씨는 한때 공인회계사를 꿈꿨던 경영학도. 대학 1년을 마치고 군에 다녀온 1999년까지만 해도 취직과 인생 진로를 고민하던 평범한 복학생이었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험난한 인생이 시작됐다. "분단된 조국 통일, 사회 모순 척결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 보였죠." 2000년 경영대 학생회장, 다음해에는 총학생회장이 됐다.
그는 학생회장 당선 이후 곧바로 '수배자'가 됐다. 한총련 산하의 학생회장은 자동적으로 '이적단체'인 한총련의 대의원이 되기 때문이다. 연세대 경기대 전남대 등의 교내에서 박씨처럼 힘든 겨울을 보내는 한총련 수배자는 170여명이다. 7년이나 도피 생활을 하는 수배자도 5명이나 된다.
박씨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가족 문제였다. "자수하라는 전화에서 집으로 찾아오는 형사들까지, 집안에는 바람 잘 날이 없어요." 재작년 추석에는 옷가지를 전해준다며 찾아온 아버지를 만나러 학교정문에 나갔다 숨어있던 경찰에게 잡힐뻔 했다. "아버지를 이용했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미안하다. 너를 위해서 그랬지만, 네 눈을 보니 도저히 너를 붙잡을 수 없었다'고 말하시는데 눈물이 왈칵 솟더라구요."
박씨처럼 수배자의 길을 걷다 붙잡힌 사람의 사연도 여러가지다.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던 윤용조씨의 사연이 대표적이다. 4년간의 수배생활 도중 심장질환이 생긴 윤씨는 병이 악화해갔으나 '수배자'라는 신분 때문에 치료를 미루다 결국 생명이 위독해지자 지난해 말 입원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박씨는 "윤씨 외에도 후두암으로 투병 중인 동생 병문안을 갔다 붙잡힌 친구, 가족이 위독하다는 거짓 연락을 받고 집으로 달려갔다 잠복중이던 경찰에게 구속된 선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연이 있다"고 씁쓸해 했다.
하지만 박씨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가 유세과정에서 "한총련 합법화를 고려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에 기대를 건다. 물론 그는 초조해 하지는 않는다. "혹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국가보안법에 대한 '불복종 운동' 차원에서 끝까지 버틸 생각입니다. 남북 화해는 우리쪽에서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자를 정문까지 배웅을 나온 그는 "올 여름에는 저기 보이는 먹자골목 돼지갈비집에서 소주 한 잔 기울일 수 있길 빕니다"라며 밝게 웃었다. 하지만 그는 정문 밖으로는 한 발짝도 넘어오지 않았다.
/정상원기자 ornot@hk.co.kr
★한총련 합법화 시도
한총련이 출범 10주년을 맞아 학생운동의 위기와 이적단체 규정이라는 안팎의 시련을 넘어 새로운 단체로 거듭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1993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모체로 출범한 한총련은 96년 8월 이른바 '연세대 사태'와 이듬해 한양대에서 학생과 경찰간 물리적 충돌 속에 발생한 '이석 치사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됐다. 이적단체로 규정된 후 2001년 8월까지 1,254명이 구속됐고 매년 500∼600명의 수배자가 양산되는 등 한총련 활동은 사사건건 사법당국의 처벌대상이 됐다. 당국은 97년부터 매년 학생들의 직접 선거로 당선된 총학생회장, 단과대 회장, 동아리연합 회장 등이 자동적으로 한총련 대의원 자격을 얻는 규정을 근거로 이들을 무조건 사법처리 대상자로 분류했다. 이 때문에 한총련 구속자 수는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부 출범 후에도 크게 줄지 않았다.
한총련은 이적단체라는 '낙인'이 찍히면서 당초 209개에 달하던 참여대학중 90여개 대학이 탈퇴하는 등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안팎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변신을 시도한 한총련은 2001년 4월 대의원대회에서 종전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삭제하고 '6·15남북공동선언 정신'을 강령으로 삼는 등 한총련 합법화의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노무현(盧武鉉)정부가 출범하는 올해를 학생운동의 '대전환기'로 삼아 한총련의 대변혁과 대중화를 이룬다는 계획이다.
변화를 이끌고 있는 정재욱(鄭栽旭·25) 연세대 총학생회장은 "촛불시위와 2002 대선유권자운동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한총련이란 이름이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하게 한총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체로 변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도 '한총련 합법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또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합법화 논의를 하고있다. 실제로 최근 수사당국과 법원도 한총련 대의원에 대해 형식적인 처벌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승교(金承敎) 변호사는 "수배자가 체포되더라도 한총련 탈퇴서를 쓰면 즉시 기소유예로 풀려나고, 기소가 되더라도 집행유예 판결을 받는 게 다반사"라며 "합법화 논의를 질질 끌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명수기자 lecero@hk.co.kr
★한총련 불법화 이유
1997년 대법원이 5기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면서 적용한 법규는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등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동조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국가보안법 제7조 1항.
한총련이 '연방제 통일 방안' 등을 강령에 삽입하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 주장에 동조했다는 게 이적단체 규정의 근거로 작용했다. 화해 분위기 조성 등 남북관계에 있어서의 괄목할 만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총련 합법화가 쉽지 않은 것도 이런 현행법 규정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총련은 2001년 강령에서 연방제 규정을 삭제하는 등 꾸준한 합법화 시도를 해왔으나 사법당국의 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은 상태다. 검찰 관계자는 "한총련의 강령은 국가보안법상 이적성을 입증하는 하나의 유력한 자료일 뿐"이라며 "여전히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을 펴는 등 북한측 입장에 동조하는 한총련은 국가안보에 위협적 존재"라고 밝혔다. 법원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법원은 불과 4개월 전에 있었던 10기 한총련 의장 김모씨에 대한 공판에서도 "남한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과 궤를 같이 하는 주장을 해온 점 등으로 볼 때 친북 이적단체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물론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들에 대해 대부분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의 '기술적'인 변화는 있었으나 원론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는 아직 요원한 상황. 한총련이 이적단체가 아니라는 99년 대전지법의 이례적 판결도 이듬해 항소심에서 곧바로 뒤집어졌었다.
민변 소속의 한 변호사는 "북한에 대한 반국가단체 규정이나 국가보안법이 엄존하는 이상 한총련의 합법화는 요원한 상태"라며 "그러나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국가보안법 개폐 및 한총련 합법화에 긍정적 입장을 표하는 등 전체적인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점은 희망적"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박진석기자jse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