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상대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상대 야구부에 들어갔다. 전주북중 시절, 일제에 의해 좌절됐던 야구에 대한 꿈과 미련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대 야구부는 순수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고 있어 야구부원들은 공부는 공부대로, 운동은 운동대로 해야 했다. 하지만 하숙집 밥을 먹으며 고된 야구 훈련과 공부를 병행하기란 무척 힘들었다. 결국 나는 아쉬움 속에 야구부 유니폼을 반납해야 했다. 이로써 야구 선수로서의 내 인연은 끝이 나고 말았다.서울대 상대 6기 동창 가운데는 정말 인재가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동창들을 만나면 "6기는 대통령을 빼고는 모두 배출했다" 고 자랑스러워 한다. 이현재(李賢宰) 전 국무총리, 김재순(金在淳) 전 국회의장, 서울시장을 지낸 조순(趙淳) 전 부총리,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홍성철(洪性澈) 전 통일원장관, 유치송(柳致松) 전 민한당 총재, 고재청(高在淸) 전 국회부의장 등이 동기들이다. 언뜻 보기에 상대 졸업생들이 재계보다는 정계에 많이 진출한 것처럼 비쳐지는데, 사실은 학자나 경제 전문가로서 능력을 인정 받다가 뒤늦게 정계에 입문한 인사들이 많은 것이니, 따지고 보면 대부분 제 길로 갔던 셈이다.
사실 내게도 정치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남을 탓하기도 싫지만,남에게 이유없이 비난 받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나는 기업인이면 기업인, 정치인이면 정치인들이 각자 걸어가야 할 길이 따로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내 자신 모나미를 키운 기업인으로 평생 살아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쟁쟁한 동기들을 둔 덕분에 나는 뜻하지 않게 로비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1988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6공화국이 출범했을 때의 일이다. 6·10 민주화운동에 이은 6·29선언으로 국민의 직접 선거를 통해 새 정부가 출범했으니 새 내각에 거는 기대도 컸다. 어떤 인사들이 새 정부를 꾸려나갈지 나도 관심이 컸던지라 발표된 내각 인사들의 명단을 꼼꼼히 챙겨보았는데 놀랍게도 대학 동기 2명이 한꺼번에 입각을 했다. 이현재씨가 총리를 맡게 됐고, 홍성철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됐던 것이다.
다음날 도하 각 신문에는 두 사람의 프로필과 함께 인터뷰가 실렸는데 내가 홍역을 치르게 된 계기가 바로 신문 보도 내용이었다. 이 총리와 홍 실장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인터뷰를 했다.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마침 똑같은 질문이 있었다. "학창시절 가장 가깝게 지내셨던 분이 누구냐" 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분이 마치 입을 맞춘 듯 "모나미의 송삼석 사장" 이라고 대답을 했던 것이다. 각각 다른 신문에 새 내각의 총리와 대통령 비서실장이 가장 친한 친구로 동일 인물을 지목했으니, 그날부터 사무실 전화기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공직에 있거나, 공직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는 선후배들의 인사 청탁이 많았다. 아예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누구누구 소개로 전화를 하게 됐다며 노골적으로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실력이 있으면 출세하고 발탁이 될 텐데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냐" 고 점잖게 꾸짖었지만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후진 문화가 백주에 횡행할 수 있단 말인가. 권력을 통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탄식과 한탄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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