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던 터라 '양심수가 없다' '취임 사면은 없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합니다." 1998년 7월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선고 받아 부산교도소에 복역중인 박경순(朴敬淳·47)씨 가족은 요즘 좌불안석이다. 5년째 '양심수의 아내'로 힘겨운 나날을 견뎌 온 김이경(金利耕·42)씨는 설날인 1일 서울 동대문구 돈암동 집에서 남편의 옥중편지를 읽다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한 겨울 혹한에 옥중에서 홀로 설을 쇠어야 하는 남편이 가엽기도 했지만 혹시나 기대했던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 취임기념 사면복권이 물 건너가지나 않을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노 후보가 당선된 이후 남편의 사면에 대한 희망이 더 커졌었다"는 김씨는 "새 정부마저 수감중인 몇 명을 구제해준다는 식으로 양심수 문제를 접근해선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씨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양심수는 구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의 사면권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이런 법에 희생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내시위에 연루돼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어렵사리 졸업하고 울산에서 서점을 하던 박씨는 98년 DJ정부 첫 공안사건인 '영남위원회사건'으로 구속됐다. 90년대 초반부터 울산지역에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지하혁명조직 '영남위원회'를 구성하려 했다는 혐의로 박씨 부부를 비롯, 김창현(金昌鉉) 당시 울산 동구청장 등 15명은 1심에서 징역3∼15년의 중형을 받았다. 시민단체와 인권변호사 등의 노력으로 관계자들은 2심에서 대부분 무죄로 나왔지만 '수괴'로 지목된 박씨는 1심에서 15년형, 2심 등에서 7년형을 선고받아 유일하게 복역 중이다.
남편과 함께 구속됐다 2000년 1월 무죄로 풀려난 김씨는 현재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김씨는 "기관원 8명이 옆집에 숨어서 3여년 동안 가족간의 대화와 통화내용을 도·감청했다는 사실을 조사과정에서 알고 말문이 막혔다"면서 수사기관의 막무가내식 불법 도·감청을 고발하며 혀를 찼다.
새해들어 김씨는 남편이 잘하면 풀려날 것이란 기대감을 키우고 있다. 영남위원회 사건의 변론을 맡았던 문재인(文在寅)변호사가 새 정부 민정수석으로 내정된 데다 노 당선자도 후보시절 석방탄원서를 제출했기 때문. 문 변호사는 "영남위원회 사건은 박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보법 개정의 큰 틀에서 풀어야 할 문제"라면서도 "당시에도 국보법 적용의 실효성에 논란이 제기됐었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김씨는 "현재 간경화 말기 상태로 몸이 너무 쇠약해져 과연 남편을 살아 생전에 다시 볼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면서 "교도소측이 독극물 반입의 위험성을 거론하며 한사코 한약 차입을 거부해 남편이 궁여지책으로 요료법(尿療法)으로 자가치료중이다"고 하소연했다. 외아들 정우(正宇·12)군은 이날 "아버지 없는 5번째 설을 쇠었습니다. 올 추석 때는 꼭 아버지와 함께 성묘를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편지를 곱게 접어 부쳤다.
/정원수기자 nobleli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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