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 5년의 성적은 낙제점인가.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을 결산하는 성적표가 나와야 할 시기에 잇달아 악재가 터지면서 햇볕정책이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불과 3주후면 임기가 끝나는 김 대통령에겐 사태를 반전시킬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김 대통령은 그의 임기 중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햇볕정책이 여론의 뭇매를 맞는 와중에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됐다. 그의 햇볕정책은 지난 5년 동안 획기적인 진전을 보였지만, 정책을 추진하는 그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햇볕정책 지지자들조차 불만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임동원 특사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지도 못한 채 돌아오고, 북에 거액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햇볕정책에 대한 그 동안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있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6·15 직전에 돈을 보냈다면 남북정상회담을 돈 주고 산것이나 다름 없지 않으냐, 노벨 평화상의 권위에도 금이 간 것 아니냐, 김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간 특사를 김정일이 만나주지도 않았으니 돈 주고 뺨 맞은 꼴이 아닌가, '악의 축'이고 '무법자'인 김정일에게 거액을 송금한 남한을 동맹국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 사람들은 개탄하고 있다.
여론이 이렇게 들끓고 있으니 북한에 보낸 돈의 실체를 덮고 지나가기는 어렵게 됐다. 김 대통령은 "현대가 보낸 돈이 남북 경협에 사용된 것이라면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 문제로 인해 평화와 국익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그 말이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다.
만일 그 의혹을 덮는다면 대북정책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기 힘들 것이다. 남북관계가 일시적으로 냉각되더라도 평화와 국익을 위한 먼 길을 가려면 반드시 국민의 의혹을 해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노무현 당선자는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는데, 김대중 시대의 대북정책과 노무현 시대의 정책은 달라야 한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오랜 냉전시대에 굳어진 벽을 녹이는 누구도 해 본 적이 없는 작업이었다. 조급한 나머지 무리와 과욕이 따르고, 성과가 나타나면 자만심을 갖거나 북측과 신뢰관계가 형성됐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허술한 특사 파견이나 대북 송금등에서 그런 자세가 잘 드러난다.
김 대통령은 이런 시행착오 등을 통해서 남북관계에 숨어있는 지뢰들을 상당부분 제거했다. 노무현 시대의 대북정책은 한층 더 안전하게 갈 수 있다. 이미 많은 국민들은 냉전논리에서 벗어나 북한에 마음을 열고 있고, 북한의 속성에 대해서도 좀 더 잘 알게 됐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 왜 시련을 겪고 있는가를 파악해 그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선 햇볕정책은 (앞으로 명칭이 어찌 되던 간에) 한 정권 안에 끝낼 수 있는 과제가 아니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 분단 50년 동안 누적된 문제를 5년 안에 풀겠다는 생각은 과욕이고, 허영일 수가 있다.
또 대북정책은 한 지도자의 애국심이나 결단에 의존하기보다 민주주의의 힘으로 추진해야 한다. '통치행위'의 폭을 줄이고 열린 토론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 한 지도자가 개인기로 대북정책을 끌고 가면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그 지도자가 궁지에 몰리고, 국론이 분열될 위험이 크다. 특히 북한처럼 예측하기 힘든 집단을 상대할 때는 민주주의의 힘으로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이 매도되는 현실에 섭섭해 할 필요가 없다. 햇볕정책의 공과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지금 그가 할 일은 방어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혀 국민의 의혹을 해소하는 것이다. 남북관계에 미칠 타격에 대해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남북교류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그것이 바로 햇볕정책이 세운 공로다.
이번 사태가 정쟁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대통령과 여야가 힘을 모아야 한다. 우선 진실을 밝히고 나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햇볕정책은 실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잘못 처리하면 낙제점을 주는 사람들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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