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규명된 대북 비밀 지원 사건의 실체는 빙산의 일각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전 북한에 막대한 자금이 송금된 사실이 드러났을 뿐 대부분의 실체가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 무엇보다 현대그룹을 파트너로 삼아 의욕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가 왜 거액을 지원할 필요성을 느꼈는지, 송금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됐는지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다. 정부와 현대의 행적이 만들어내고 있는 파생적인 의문점들을 7가지로 정리해본다./박천호기자 toto@hk.co.kr 유병률기자 bryu@hk.co.kr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1.총 지휘자는 누구
현대상선이 2,235억원이란 거금을 대출받아 북한에 송금하기까지 복잡다기한 과정은 배후에 여러기관에 지시를 내릴 만한 권한이 있는 '총지휘자' 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이 고위급 인사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베일 속에 가려 있다.
엄낙용(嚴洛鎔) 전 산은 총재는 대출압력의 배후인물로 한광옥(韓光玉)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목했지만 한 전 실장은 강력 부인했다.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던 박지원(朴智元) 청와대 비서실장도 2000년 3∼4월 북한 아·태평화위원회 송호경 부위원장과 정상회담 관련 비밀협상을 벌여 유력한 배후로 지목됐다. 2,235억원을 환전, 송금하는 데는 국정원의 도움이 필수적이란 점에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林東源) 외교안보통일특보에도 의심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직접 지시·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단 북한의 공식 요구가 있었다면 사후라도 인지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결국은 김 대통령의 직·간접적 묵인하에 청와대 핵심인사가 금감위와 산업은행, 국정원 등의 작업을 지휘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2.돈의 성격은
2,235억원이 어떤 명목으로 건네졌는 지는 정부와 북한 당국, 그리고 현대 상선의 최고위층 만이 알고 있다. 감사원과 현대상선은 "개성공단개발 사업비로 북한에 지급한 돈"이라고 설명했다. 독점적 대북사업을 위한 경협자금이지 남북정상회담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개성공단 개발사업은 착수도 되지 않은 상황이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정부가 왜 위험을 감수하고 대출과정에 개입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희상(文喜相)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가 2일 "당시 현대는 남북정상회담이 안되면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노벨평화상에 관심이 있었다"고 말한 것도 단순 경협자금이 아님을 강하게 시사한 대목이다.
현대그룹의 고위관계자도 "정부가 공식적인 방법으로 마련할 수 없어 대신 가져다 준 돈"이라며 굳게 닫았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현대가 아무런 이득없이 정부 지시만으로 거액을 송금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게 중론이다. 비밀지원 자금의 명목은 멀지 않아 밝혀질 사안이자 가장 폭발력이 예상되는 사건의 핵심이다.
3.국정원 개입 어느정도
국가정보원이 2,235억원 대북송금 과정에서 단순 '편의제공'을 넘어 환전·송금을 주도하는 등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선 외환시장에 포착되지 않고, 단 며칠새 2억달러로 환전하는 것은 국정원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한 외환딜러는 "2000년만 해도 하루 외환거래량이 15억달러 정도였기 때문에 수천달러만 환전돼도 매수주체가 즉시 알려졌다"며 "암달러시장이나 2금융권에서 바꾸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국정원이 시중은행, 2금융권 등에 분산 예치하고 있던 외화예금 형태 비자금을 동원, 환전·세탁했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시 되고 있다.
송금도 국정원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당시 현대를 통해 이 같은 거액이 해외 송금된 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무역거래를 위장, 현대의 해외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로 2억달러를 보낸뒤 이 돈이 다시 중국 베이징(北京), 마카오 등의 북한 외화벌이용 계좌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4.조직적 은폐?
지난해 9월 대북비밀지원 의혹이 불거진 후 이후 일관되게 "현금 지원은 없다"고 부인하던 관련 핵심 인사들의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진실을 덮으려고 입을 맞춘 것은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해 10월5일 국회 운영위 청와대 비서실 국정감사에서 "단돈 1달러라도 준 게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도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면담 요청 주장에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입을 다물었다.
산은에 대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던 민주당 한광옥 최고위원(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내 말이 허위라면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엄 전 총재를 고소하기도 했다. 이기호(李起浩) 경제특보(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도 "대출에 대해 보고 받지도, 알지도 못했다"며 '모르쇠'로 일관했다.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도 "운영자금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안다"고 한나라당 의원들의 추궁을 비껴갔다. 비밀지원 의혹에 연루된 여러 인사들이 이처럼 한 목소리로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협의를 통한 다짐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5.준돈 2,235억 뿐인가
감사원이 밝힌 2,235억원은 북한에 들어간 돈의 일부라는 의혹이 많다. 현대상선 뿐 아니라 각 계열사를 통해 훨씬 많은 돈이 북한에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4,000억원 대북지원설을 처음으로 폭로했던 한나라당 엄호성(嚴虎聲) 의원은 2일 "현대가 대출 받은 4,000억원을 모두 북한에 준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현대가 기업어음 매입자금 등으로 사용했다고 한 나머지 1,765억원에 대해 계좌추적을 해보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이성헌(李性憲) 의원도 "현대건설이 2000년 5월말 싱가포르 지사를 통해 1억5,000만달러를 송금하는 등 정상회담 전에 이익치(李益治) 당시 현대증권 회장의 주도로 각 계열사별로 무려 5억5,000만달러가 모아져 북한에 넘어갔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1월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 의원은 "2000년 5월 현대전자가 미국 모토로라에 스코틀랜드 덤퍼린 반도체 공장을 1억6,200만달러에 매각했는데, 그 중 1억달러가 북한으로 갔다"고 주장했다. 한편, 내일신문은 30일 "2000년 10월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이 재계 한 원로에게 '북한 개발권 대가로 남북정상회담 직전 싱가포르의 북한 계좌를 통해 5억달러를 넣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6.현대 반대급부 받았나
감사원 발표대로 현대상선이 산은 대출금 4,000억원 중 2,235억원을 대북관련 사업자금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 자금은 정상적인 남북경협자금이 아니라 '뒷돈'의 성격이 강하다는 게 중론. 그렇다면 자금 사정도 좋지 않은 현대가 거액의 차입금까지 동원해 가면서 대북송금의 '총대'를 멘 이유는 무엇인가.
고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개인적 열정에서 출발한 대북사업은 DJ 정부의 햇볕정책이 아니었다면 결실을 맺기 힘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98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소 떼 방북'부터 금강산관광, 한반도 최대 공업단지를 목표로 추진중인 개성공단사업 등은 사실상 현 정권과 현대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서 현대는 대북협상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민간 창구' 역을 톡톡히 해준 셈이고, 정부는 현대의 야심찬 대북 투자사업에 보호막을 제공해준 것이다.
일각에서는 99년 현대전자의 LG반도체 흡수통합(빅딜)과 현대건설 및 하이닉스 등에 대한 채권단 지원 등 현대에 우호적이었던 각종 정책들이 '대북공조'에서 비롯된 반대급부라는 주장도 있어 이번 사태가 일파만파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
7.2,235억원 어디 썼나
현대는 감사원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2,235억원을 개성공단 사업비등 7대 대북사업에 사용했다고 밝혔다. 현대의 7대 대북사업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비롯해 개성공단 개발사업, 통천경공업단지 사업, 철도·통신·전력 등 SOC건설 사업, 평양체육관 건립 등 7가지. 하지만 금강산 관광사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상 단계에 머물러 있거나 산업은행으로부터 대출 받은 2000년 6월에 사업비를 사용할 시점이 아니었다는 것이 현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현대가 2,235억원의 용처 중의 하나로 거론한 개성공단 사업이 발표된 것은 2000년 8월10일. 따라서 북한과 합의도 하기 전인 2000년 6월에 개성공단 사업을 위해 돈부터 건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남북철도 사업도 현대아산이 2002년 10월부터 본격적인 착수에 들어갔기 때문에 시기가 맞지 않다. 또 장전항 종합편의시설 설치, 통천지역 개발 등 대부분 사업은 아직 착공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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