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1월30일 런던에서 영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됐다. 영일동맹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에 대한 일본의 우려는 영국의 우려만큼이나 컸다. 일본이 이 상황에 대처하는 길은 러시아에 노골적으로 맞서는 것과 타협을 통해 이익을 조절하는 것 두 가지가 있었다. 일본은 처음에 러시아와 맞서봐야 승산이 없다는 판단 아래 후자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두 나라는 제휴를 모색하게 됐다.동맹의 큰 틀은 중국에서의 영국의 이익과 조선·중국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두 나라가 서로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조약은 두 나라 가운데 한 쪽이 제3국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다른 쪽은 중립을 지키고, 한 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경우에는 다른 쪽이 참전한다고 규정했다. 외교사가들은 한국의 희생을 대가로 영국이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제휴 가능성을 없애버렸다는 데서 이 조약의 중요성을 찾고 있다. 또 이 동맹은 영국이 평화시의 고립이라는 자국의 외교적 전통을 처음으로 깬 사건이기도 하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도, 영국이 개입할 위협 때문에 프랑스는 동맹국 러시아를 지원할 수가 없었다.
영일동맹은 러일전쟁 후인 1905년 8월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 확인, 인도 이동(以東)지역으로의 적용범위 확대, 방어동맹에서 공수(攻守)동맹으로의 성격 전환 등을 담은 제2차 동맹으로 경신됐고, 1911년 7월 대독(對獨)동맹 성격의 제3차 동맹으로 경신됐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일본의 대립이 명확해짐에 따라, 조약은 1921년 12월 워싱턴회의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폐기되었다.
고 종 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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