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내홍을 넘어 뇌사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29일 서청원(徐淸源) 대표의 대표직 사퇴선언은 지도부 진공상태를 불러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간 대립을 격화시킬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서 대표는 대표권한대행을 지명, 최고위원 회의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최고위원들이 "더 이상 남아있을 명분이 없다"며 속속 사퇴의사를 표명하고 있어 그 기능이 정지될 것으로 보인다.하순봉(河舜鳳) 최고위원은 "앞으로 최고위원들은 일절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대표대행과 당3역이 모든 일을 관장하게 될 것"이라며 "우리의 정치적 사퇴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더욱이 김영일(金榮馹) 사무총장, 이상배(李相培) 정책위의장 등 주요 당직자도 이날 서 대표에게 사의를 밝혀 당무가 완전 마비될 지경에 빠졌다.
이런 상황은 인적 청산을 요구해온 개혁파와 이에 맞서온 보수파 간의 극단적 대결을 막아주었던 중간 지대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당 개혁특위가 가동 중이지만, 다양한 성향의 의원들이 구심점 없이 혼재해 있어 조정기능을 해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후 두 세력의 힘겨루기는 봇물이 터지는듯한 무한 대결의 양상을 띌 것으로 보인다. 설사 개혁특위가 지도체제 개편안 등을 마련한다 해도 이해가 다른 의원들의 중구난방식 반발을 초래할 개연성이 크다.
서 대표 사퇴의 직접적 요인은 대선 재검표 결과였다. 따라서 재검표에 대한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해온 '국민 속으로' 등 개혁파는 크게 고무돼 있다. 이들은 "지도부 퇴진으로 당 면모를 일신할 전기가 비로소 마련됐다"며 "이 여세를 계속 몰아갈 것"이라고 호언했다.
개혁파는 우선 대표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민정계 최고위원들이 입장을 번복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반드시 저지하겠다는 자세다. 나아가 인적 청산의 대상을 공개적으로 적시해 보수파와의 정면 충돌도 불사할 태세다.
이회창(李會昌) 전 대통령후보 주변에서 실세로 행세하며 대선을 망친 의원들을 '시범 케이스'로 물갈이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7적(敵)', '10적' 등으로 불리는 그 대상은 이 전후보의 측근 중진인 H, Y, K, S 의원과 핵심 참모였던 재선의 L, K, K, J 의원 등이다.
구전(口傳)으로 '청산 명단'을 전해들은 당사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개혁의 미명 아래 당을 말아 먹으려 하고 있다"며 "그 쪽이 나가주는 게 훨씬 손쉬운 방법"이라고 비난했다. 최근에는 보수파 내부에서도 "털어낼 사람은 하루 빨리 털어내고 우리끼리 가자"는 주장이 나오고 조만간 결집된 목소리를 내 개혁파를 압박하겠다는 분위기가 일고 있다.
한나라당의 내홍은 당 진로에 대한 대립을 넘어 분열 위기로 비화하는 형국이다.
/유성식기자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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