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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뜨거운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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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뜨거운 보수

입력
2003.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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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져보니 나는 분명 보수에 속하는 것 같다. 하루 아침에 좋은 세상이 오리라곤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이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보수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수연(然)하는 사람들과 같은 편이 될 마음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인정할건 인정하자. 일반적으로 보혁대결에서 보수는 항상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기존 체제의 도전자인 개혁세력에 비해 보수는 사회적 자원을 압도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은 물론 대중매체도 연구소도 대부분 그들 몫이다. 개혁세력이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사람 머리 수 정도. 그나마 우리 사회의 개혁세력은 사람 머리 수의 여유조차 별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보수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다. 방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바로 그것이다. 개혁론자에게 완벽한 개혁의 절차와 정연한 결과의 청사진을 한 번 주문해 보라. 각론으로 들어갈수록 보수가 유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제도의 그럴듯한 청사진을 만들기 보다는 그 허점을 비판하기가 훨씬 더 쉬우니 말이다. 당장 인사문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안정된 국정운영 경험과 경륜을 내세웠을 때 효과적인 반박이 어디 한 번이나 나온 적이 있었는가?

방법에 대한 주문은 개혁론자에게도 득이 된다. '뜨거운 가슴'을 잠시 추스르고 계획을 좀 더 다듬도록 자극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을 때 보혁논쟁은 생산적인 결실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걸 마다한다면 어느 쪽이든 사회적 호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보수는 수구세력으로 외면받을 것이고 개혁세력은 지난 10년의 실패를 다시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보수가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개혁론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사실 보수의 유리한 위상을 깨닫는다면 그런 여유를 갖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생산적인 보혁대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보수이다.

그런데 논쟁이 너무 귀찮아서일까? 근자에 들어 이른바 보수의 대가들이 보수의 좋은 무기를 버린 채 엉뚱한 얘기로 전열을 흩트리는 것을 본다. 그들은 개혁의 방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제기의 방식을 물고 늘어진다. SOFA, 즉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의 내용도 제대로 모르는 채 SOFA 개정을 주장한다고 촛불시위 참여자들을 꾸짖는 신문기자가 있다. 인터넷이 지닌 잠재적 폭력성을 근거로 인터넷을 통한 문제제기 모두를 매도하는 논객도 그들 중 한 명이다. 흠, 그러니까 아무 이유없이 날 팬 사람을 무죄방면했다고 항의하려면 먼저 형법과 형사소송법부터 완벽하게 공부하고 와야 한단 말이지! 질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덮어놓고 매질부터 한다면 다음부터 질문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얘기 아닌가?

이들의 보수는 과거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권위주의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문제의 내용을 따지기 보다 문제제기 자체를 억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는 보혁대결이 시정(市井)의 싸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혹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시정의 판에서는 사회적 자원을 독점한 보수가 유리하리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다수의 절망을 누적시켜 폭발의 시점을 앞당기는 패착이 될 뿐이다. 보수의 이점은 냉정한 머리에 있거늘 왜 보수가 자기들까지 뜨거워져서 아무 이득없는 열전을 벌이려 하는 것일까?

머리가 뜨거워진 보수는 보수 스스로 도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보수가 설득력을 유지할 길이기 때문이다. 곪디곪은 종양마저 애지중지 보듬고 가야 보수인 것은 결코 아니다.

정 준 영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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