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인 하면 흔히 열녀나 효부, 현모양처를 떠올린다. 남존여비가 불문율로 통하고 순종을 여자의 미덕으로 알던 그 시절, 여자는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는 것이 규범이었다. 그러나 전혀 달리 산 여인들도 있었다. 별난 팔자라고 화제가 되거나 '못된 년'으로 몰리기도 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모은 '나는 당당하게 살겠다' (문자향 발행)가 당시 부녀자 행실 교과서처럼 쓰였던 '여사서'(女四書·여이연 발행)와 함께 나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문헌 연구자인 김건우씨가 옛 문헌에서 골라 엮은 '나는 당당하게…'는 교과서적 삶을 거부한 옛 여인들의 이야기다. 양반가와 궁중 여인에서 기생, 노비, 무당 등 하층 여인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통념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았던 60여 명의 삶을 소개했다.
'나는 당당하게 살겠다' '남자를 품안에' '남편의 수염을 뽑으며' '평강공주의 후예' 등 9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머리를 차지한 검녀(劍女) 이야기는 지금 보아도 감탄할 만하다. 멸문지화를 당한 양반집의 종으로 검술을 배워 세상을 떠돌던 그는 '평범한 남자를 섬기면서 일생을 마치기는 싫다'며 원하는 남자를 골라서 함께 살다가 실망하는 순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난다. 여성의 사회 참여는 물론 배우자 선택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포상금에 눈이 멀어 불쌍한 늙은 형수를 고발한 양반의 뺨을 후려친 관청 노비,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 임금 앞에서 북벌론의 허점을 당당히 지적한 임경업의 첩 매환 등은 기개의 표상이다.
또 내시와 결혼했다가 성욕을 참을 수 없어 도망을 친 뒤 길에서 만난 중을 강제로 겁탈해 혼인한 여인, '당신의 투기를 다스리려고 일부러 냉대해 왔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는 분통이 터져 남편의 수염을 죄다 뽑아버린 재상 부인, 남편이 자기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때리고 가두고 굶겼던 부인 등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시절에 그런 여자들이 있었나 하고 깜짝 놀랄 '통쾌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신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좌절한 여인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도 있다.
동양사상을 여성의 눈으로 재해석해 온 이숙인(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씨가 번역한 '여사서'는 조선시대 부녀자 교과서로 쓰였던 중국 고전이다.
한나라 반소(班昭)의 '여계'(女誡), 당나라 송약소(宋若昭)의 '여논어'(女論語), 명나라 인효문황후(仁孝文皇后)의 '내훈'(內訓), 청나라 왕절부유씨(王節婦劉氏)의 '여범첩록'(女範捷錄)을 청의 왕상(王相)이 한데 묶어 주해한 책이다.
외간 남자에게 잡혔다는 이유로 손을 잘라 낸 여인이나, 집에 불이 났는데도 여자는 밤에 혼자 집 밖에 나갈 수 없다며 버티다가 타 죽은 여인을 열녀로 추앙하는 등 여성에게 봉건적 굴레를 강요한 글들이다.
이 책은 1960·80년대에 세 차례에 걸쳐 서로 다른 한글 번역본이 나왔으나 당시 번역자들은 한결같이 '전통적 여성 미덕을 일깨우기 위해 책을 낸다'고 했고 번역이 부실한 대목도 있었다.
이번에 다시 나온 이씨의 역주본은 페미니즘에 입각한 비판적 시각에서 읽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정확한 번역과 꼼꼼한 역주도 장점이다.
/오미환기자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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