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월29일 평안도 순천 군민 3천여 명이 시장세(市場稅) 징수를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 시위는 이내 폭동으로 변해 군민들은 재무서와 경찰서, 군청으로 몰려들어가 관리들에게 거세게 항의한 데 이어, 일본인 점포들을 습격해 불사르고 일본 상인들을 살해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시장세는 그 전 해인 1909년 4월1일 연초세(煙草稅)·도장세(屠場稅)와 함께 새로 생긴 세목이다. 일본은 1905년의 제2차 한일협약(을사조약) 이후, 그 때까지 지방관에게 있던 징세권을 일본 관리들에게 넘기는 한편 신규 세목들을 늘려나갔다. 이 가운데 특히 시장세는 전통적 상업 체제를 뒤흔들어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져, 조선 상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1909년 당시 조선에 정착한 일본 상인은 이미 1만7천여 호에 이르러 전국 어디나 일본 상가가 들어서지 않은 곳이 없었다.순천에서 시장세를 징수하기 시작한 것은 1909년 11월부터다. 세율은 모든 물품 거래액의 1%였다. 매매가의 1%는 이윤의 1할이 넘는 고율이어서 상인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선 상인들은 처음에 철시(撤市)를 통해 납세를 거부하다가, 해를 넘기며 평안도와 함경도 일부 지방을 중심으로 집회와 시위로써 시장세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순천 사건이 터진 1월29일은 새해 들어 순천이 내내 철시 상태였다가 처음으로 장이 선 날이었다. 당시 순천은 인구의 1/3이 농사와 장사를 겸했다.
순천(順川)은 평남 중앙 내륙의 대동강 상류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전라도 순천(順天)과는 한자가 다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등의 수필집으로 유명한 전혜린(田惠麟: 1934∼1965)이 평안도 순천 출신이다.
고 종 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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