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1941년 나는 전주북공립중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23회였다. 당시는 고등학교가 따로 없었고, 5년제 중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학교명에 '북'자가 붙은 것은 당시 일본인들만 다니던 남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학생들만 다니던 전주북중은 경기, 경복, 경북중에 이어 전국 4번째로 설립된 공립중학교였고 뒤이어 생긴 평양중과 함께 5대 명문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몰렸고, 학생들과 지역 주민들은 전주북중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삼례초등학교 18회 졸업생인 나는 동기생 2명과 함께 전주북중으로 진학했다. 많은 학생들이 하숙이나 자취를 했지만 나는 삼례에서 전주까지 기차 통학을 했다. 삼례를 출발한 기차는 조촌, 덕진 등을 거쳐 전주에 도착했는데, 나는 기차 통학 시간 대부분을 독서로 보냈다. 지금도 나는 책상이나 침실, 혹은 승용차 안에도 책을 놓아두고 수시로 읽는데, 이 버릇은 전주북중 시절 기차 통학을 하면서 생긴 것이다.
이리에서 출발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하던 전주북중 학생은 50명 정도였다. 5학년 선배가 항상 기차통학 반장을 맡았는데, 전주역에 내리면 우린 가방을 등에 메고 반듯하게 정열해 학교까지 구보를 했다. 그것은 전주북중 학생이라는 자긍심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일본인들에 대한 시위이기도 했다. 학교가 끝나고 기차를 타려면 2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는데, 나는 이 시간을 대부분 운동을 하며 보냈다. 나는 전주북중에 입학하자마자 야구부에 지원했다. 삼례초등학교 시절, 나는 읍내에서 '광파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저씨에게서 야구를 배웠다. 그분은 사진을 찍어주고 번 돈으로 야구 용품을 사 사람들과 함께 캐치볼을 하거나 야구 시합을 벌이곤 했는데 그 분 덕에 나는 야구에 눈을 떴다. 하지만 정식 선수가 되진 못했다. 4학년에 올라갈 무렵인 1944년 초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일제가 '야구는 적국의 운동'이라는 이유로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꿈 많던 소년시절, 그 때만큼 아쉬웠던 순간도 없었다.
85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전주고가 대망의 우승컵을 쥐게 됐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재경 전주고 총동창회장이었던 나는 서울운동장으로 결승전 응원을 나갔다. 관중석에는 전주고 출신 국회의원들 대부분이 참석했다. 결승전에서 모교가 승리하자 응원 나온 동문이나 학생 모두 감격에 겨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대대적인 잔치가 이어졌다. 운동선수들이라 그런지 먹는 양도 엄청나 끊임없이 고기가 들어왔지만 음식 나르는 속도가 먹어치우는 속도를 따라가질 못했다. 즉석에서 나는 야구부와 모교 발전을 위한 기금을 모으자고 제안, 1,150만원을 모아 전달했다. 그때만큼 야구와 모교에 대한 정열이 뜨거웠던 적도 없다.
야구부가 해체된 뒤 나는 기계체조와 검도에 매달렸다. 학교측은 유도는 가르치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전주북중 학생들은 수시로 남중의 일본인 학생들과 부딪쳤고, 패싸움도 자주 했다. 학교측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칠 경우 일본인 학생들과 싸우는데 사용될 까봐 꺼렸던 것이다. 반면 검도는 달랐다. 당시에는 싸움을 해도 흉기를 드는 법은 없었다. 아무리 검도를 잘 해도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나는 수영과 스케이팅을 했다. 삼례초등학교 시절 동네 하천에서 봉변을 당할 뻔 한 적도 있지만 수영은 지금도 자신 있는 운동이다. 웬만해선 감기에 걸리지 않을 만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중학시절 열심히 한 운동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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