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중국 문화는 오래됐을 뿐 아니라 찬란하다고 말한다. 찬란하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해 가치가 변치 않는다는 의미, 곧 보편성을 뜻한다. 중국의 역대 권력은 광대한 땅과 인구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보편성의 추구에 역점을 두었는데, 이것이 글쓰기로 나타나 고전으로 남게 됐다. 중국의 고전은 인류 지혜의 창고라 할 만큼 엄청나다. 고전은 속성상 시대를 초월해 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당면 과제를 해결할 때 고전에서 실마리를 찾는 경향이 있다. 개혁·개방과 마르크스주의의 상충을 완화하기 위해 예기(禮記)에서 소강(小康)이란 용어를 끌어온 것이 대표적인 예다. 공산당은 예기에서 '먹고 살 만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소강을 '중산층 수준의 생활'로 해석해 경제건설의 당면 목표로 설정했다.정치와 고전연구의 관계
고전의 해석과 적용이 역대 권력의 중요 관심사였던 만큼 중국의 고전·문학 연구는 강한 공리성과 정치지향성을 띠게 됐다. 권력갈등이 있을 경우 직접 대결에 앞서 고전 비판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쟁하는 경우가 잦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신중국 건설 이후 사인방의 '수호전(水湖傳)'비판, 정풍운동에서의 '홍루몽(紅樓夢)'비판 등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왔다.
이러한 전통은 한나라 시대의 경학(經學)과 문학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정치를 위한 학문인 경학과 문학은 속성상 갈등이 불가피하다. 정치가 질서를 중시하는 반면, 문학은 질서 밖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역대 권력이 문인 길들이기를 주요 과제로 삼은 것은 이 때문이다.
개성을 규칙으로 환원시키려는 정치적 노력은 고전 연구를 역사발전 법칙 검증 작업에 국한하도록 했다. 이것이 극에 달한 때가 바로 문화혁명 기간이었다.
그렇다고 고전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문화혁명 이후 억압됐던 고전 연구 욕망은 문화열(文化熱)이라는 현상으로 폭발했다. 이때부터 한문으로 된 고전은 구어체의 백화문(白話文) 번역물 형태로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국이 산업화시대로 접어들면서 서구의 '후학(後學)'이 유입됐다. 후학이란 후기 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탈식민주의를 한 데 일컫는 중국식 용어이다.
그러나 후학은 중심과 주변의 경계를 허무는 데서 출발하므로 중국 중심주의에 젖어 있는 주류 학자들에게 수용될 수는 없었다. 5·4운동(1919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주류 진보세력이 급진사상인 후학을 오히려 신보수주의로 명명하고 거부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탈이념화 연구 경향
반면 신보수주의 지식인들은 중국적인 고전체계와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 주력했다. 고전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는 근대성의 이론이 소홀히 한 중국적인 부분을 찾아내려고 노력한 것이다.
고전 자체에 대한 연구가 중시되면서 기존의 백화문 운동은 오히려 고전의 특성을 포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구어체인 백화문은 음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문어체로 된 고전의 시각적 묘사를 심하게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문 고유의 독법으로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이 부르짖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중화(大中華)의 보편성이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한족의 고유 문화 연구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현재의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데 한계가 있다.
여진족의 금나라를 정벌한 남송의 악비(岳飛) 장군을 중화의 영웅으로 계속 칭송해도 좋으냐는 논의가 일어나는 것이 한 예이다. 다민족 국가에서 한족 문화에 대한 집착은 언젠가는 모순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중국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고고학 발굴이다. 발굴 성과에 따라 고대사는 물론 인류사와 과학기술사 등이 언제든 다시 쓰여질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까지만 해도 세계사에서 중국 고대사의 시작은 주나라였다.
고고학 발굴로 고대사 확장
그러나 1899년 허난(河南)성 은허(殷墟)에서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은나라의 존재가 인정됐다. 1921년 허난성에서 앙소(仰韶)촌이 발굴된 이후에는 고대사가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됐다. 중국의 고고학 발굴은 중국뿐 아니라 인류의 안목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중국에도 고물학(古物學) 전통이 있었지만, 근대 고고학이 도입된 것은 20세기 초 스웨덴 고고학자 요한 안데르손에 의해서다. 중국 근대 고고학은 초창기(1928∼48년), 성숙기(49∼71년), 흥성기(72∼89년), 갱신기(90년∼)의 4단계로 나눠진다. 초창기와 성숙기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29년 주구점(周口店)에서 발굴된 베이징(北京)원인의 두개골 화석과 신석기시대 거대 촌락인 반포(半坡) 유적이다. 이후 72년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서 발굴된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와 74년 산시(陝西)성 진시황릉 주변에서 나온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마왕퇴에서는 2,200년 전의 시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완전하게 보존된 상태로 출토됐다. 부장품으로 들어 있던 노자와 주역 등 서적은 학술 연구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중심론이냐 다원론이냐
90년대 성과 중 주목할 만한 것은 92년 장수(江蘇)성 우(吳)현에서 발굴된 기원전 5,000년 경의 가장 오래된 논과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에서 발굴된 발해 고분군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이제 중국이 짚고 넘어가야 할 이념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중심론과 다원론 사이의 선택일 것이다. 즉 황하를 중심으로 문명이 확장된 것인지, 아니면 중원의 넓은 지역에서 여러 문명이 다원적으로 전개된 것인지의 관점을 선택하는 문제다. 이는 동아시아 문화의 실체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지금까지 중국 고고학의 목표는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중국사를 다시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부 학자들은 이 같은 편협한 틀을 뛰어넘어 보편적 문화사와 인류학을 기술하는 차원에서 고고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문명사를 고찰해보면 중국이 가장 중국답고 위대했던 때는 중국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이 숭상될 때였다.
김 근(金槿) 서강대 교수 중국문화학과
<1980년대 이후 주요 고고학 발굴 성과>
87년:남중국해 시사(西沙)군도 수중 유물 발굴
양저(良渚)문화 중심인 저장성 막각산(莫角山) 발굴
89년:허난성 은허(殷墟) 갑골문 3차 대발굴
92년:헤이룽장성 닝안에서 발해 고분군 발굴 허베이성 니허완(泥河灣)분지 고인류 유적 발굴
93년:쩡저우 산시(山西)에서 앙소(仰韶)시대 성터 발굴
95년:산둥성 장청선인대(長淸仙人臺) 유적에서 춘추시대 유물 대거 발굴
99년:산시성 타이위앤의 수우홍묘(隋虞弘墓)에서 조로아스터교 화상석묘(畵像石墓) 발굴
2000년:쓰촨성 광한(廣漢) 삼성퇴(三星堆) 유적에서 옥기·청동기 발견
■차이나 핸드북 / 문화재 반환운동
중국 허난(河南)성 용문석굴(龍門石窟)이나 베이징(北京) 원명원(圓明園) 유적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중국 침탈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용문석굴의 수많은 불상은 거의 대부분 머리가 잘려 나갔거나 통째로 뜯겨 없어졌다. 청나라 별궁이던 원명원은 19세기 말 서구 8개 국 연합군에 의해 완전 파괴된데다 소장 보물은 모두 약탈당했다.
중국 문물학회 통계에 따르면 유실 문화재는 47개 국에 100만 여건이 흩어져 있으며, 이중 진품만 수십만 건에 달한다. 특히 전쟁 때 약탈된 것이 상당히 많다. 중국 문화재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나라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순이다.
중국은 최근 약탈당한 문화재를 돌려받기 위해 본격 나섰다. 중국역사문화보호 전문가위원회는 21일 대영박물관 등 세계 19개 유명 박물관을 비난하며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이들 박물관이 유네스코가 1995년 발효시킨 '약탈·불법수출 문화재에 관한 협약'을 위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 협약은 전쟁으로 인한 약탈·유실 문화재는 시한 없이 반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중국은 민간조직 차원에서는 물론 외교적 경로를 통한 반환운동, 해외 문화재 경매행사 참가를 통한 문화유산 회수 노력도 병행하고 있다.
/배연해기자 seapow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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