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 이 말은 영국 경제학자 마셜이 쓴 책 '경제학원리'의 첫째 쪽에 나오는 말이다. 당시 관심을 끌던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책 앞머리에 쓴 것으로 보인다. 우리 경제생활도 마찬가지다. 현재 한국경제 상태는 과거로부터 형성된 현실적 조건에 맞추어 진화한 것이다.우리 기업의 조직과 특성도 이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 재벌의 지배구조도 우리 경제조건에 맞게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 걱정하고 있는 지배주주의 가족 중심 경영, 계열사간 상호출자 및 교차적 지원, 다각화에 따른 문어발식 구조는 우리의 가족문화, 낙후된 금융산업, 경제환경의 격변에 맞추어 진화해 온 것이다. 전문경영인과 상호 신뢰 부족이 가족 중심 경영을 가져왔고, 주식시장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아 차입경영을 하게 되었으며, 수출주도 성장에 맞추다 보니 시장과 기술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여 여러 산업에 진출하게 되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최근 불거지고 있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재계의 갈등은 극히 부자연스러운 상황이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비롯하여 이에 동조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기업은 좋은데 재벌기업은 나쁘다는 식의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좋은 대기업이란 단일 업종에서 전문화되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면서 기업소유구조도 잘 분산된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대기업은 수출을 통해 돈도 잘 벌어 오면서 근로자에게도 좋은 대우를 해주고, 사회적 기여도 많이 하는 기업이다.
반대로 재벌기업은 지배주주가 중심이 되어 여러 업종에서 문어발식 경영을 하면서 경쟁력이 없는 계열사를 도태시키지 않는 기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재벌기업은 시장에서 독점적 이익을 챙기면서도 소비자나 저소득층을 위해 별로 좋은 일은 하지 않는 기업이다.
이와 같은 양분법은 우리 경제현실을 세심하게 탐구하지 않고 교과서식 기업에서 이상향을 찾은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 결과 출자총액 제한제도, 집단소송제, 구조조정본부 해체와 같은 해결책이 재벌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해결책은 기업의 모습을 바꾸기는 하겠지만, 나쁜 재벌기업을 좋은 대기업으로 바꿀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기업의 적응력을 크게 떨어뜨려 기업을 왜소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에서 장기투자가가 적은 상황에서 적절한 자금을 동원하는 것이 어렵고, 이들이 기업경영에 대한 발언권을 높인다면 미래를 위한 공격적 투자는 극히 기피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잘 되고 있는 기업 몇 개는 어느 정도 경쟁력을 유지하고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이런 기업들이 더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게 될 가능성은 적다.
현재 우리 수출에서 가장 비중이 큰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컴퓨터, 선박 등 5대 품목의 수출액은 전체 수출 금액에서 42%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산업의 대부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벌기업에서 담당하고 있다. 이들 기업과 관련된 하청업체까지 고려하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크다.
현재 우리 기업의 모습이 교과서에 그려져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해서 실험적으로 바꿀 수는 없다. 상속세의 강화와 주식시장의 발달 등을 통해 2세대, 3세대를 통해 서서히 바뀌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조급한 나머지 각종 규제를 남발한다면 투자의욕은 위축되고 기업은 왜소화될 뿐이다.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라도 뒤에서 자꾸 잡아 끌게 아니라 앞으로 가면서 열심히 일하게 하면, 서서히 엉덩이 뿔은 퇴화될 것이며 머리에 제대로 뿔 달린 멋있는 황소가 될 것이다.
홍 기 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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