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적인 그녀'로 관객 500만명을 훌쩍 넘기고 할리우드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은 곽재용(42) 감독. 만만찮은 상업성을 갖춘 '클래식'으로 또 관객 공략에 나선다. 안양에 있던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흘러나온 필름조각을 보기 위해 중학교 때 영사기를 만들었던 영화 소년. 그의 감수성은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 살아있는 듯하다. 사춘기 취향의 영화를 보면.
―얘기가 참 클래식하다. 촌스럽다는 얘기일 수도….
"요즘 멜로 영화는 감정은 없고 세련됨과 반전에만 목숨을 거는 것 같다. 멜로 영화는 축축해야 한다. 장르에 푹 빠져 더 이상 나올 영화가 없을 때, 새로운 방식으로 얘기하고 싶을 때 무르익은 작가주의 영화가 나온다. 작가주의? 우리나라에 진정한 작가주의 영화는 없다. 도식적인 화면 구성, 무조건적 절제. 이건 양식만 빌린 것이다. 울리든 웃기든 울림을 표현하는 영화가 좋다. 나? 당연히 상업 영화의 최전선에 있다." (순박한 시골 아저씨, 본인 말로는 노숙자처럼 생겼으나 그의 말에는 자신감과 가시가 가득했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왜 그리 집착하는가. '엽기적인 그녀'에 이어 '클래식'에도 나온다.
"사춘기 때 가장 애틋하게 읽은 단편이 '소나기'였다. 그런데 중학생 딸에게 읽혔더니 "재미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좀 더 재미있게 보여주려고 '엽기적인 그녀'에서는 "소년을 생매장해 달라"로 바꿨다. '클래식'은 1998년에 먼저 쓴 시나리오다."
―영화 초반부의 유치한 대사 때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았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이런 말이 나왔다던데.
"지혜의 친구가 '아이, 유치해'하고 나서 '유치해서 좋아'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표현은 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좋고 아니면 유치한 것이다. 시나리오에는 감정이 묻어있지 않아 유치한 것만 보였을 것이다."
―목걸이를 구하려고 전장에 뛰어드는 식의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보인다.
"시각적으로 충분히 보여주면 충분한 설득력을 갖게 될 것으로 확신했다. 주변 정황이 허술하면 유치하다고 치부될 수 있지만 전쟁 장면은 꽤 사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장면은 3일간 1억 5,000만원의 저예산으로 촬영했으나 화면은 꽤 다부지다.)
―연인을 육체적으로 거리 두게 만들어 안타까움을 극대화한 것 같다.
"멜로는 성적인 억압에서 출발한다. 헤어질수록 더 안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표현하려고 준하와 주희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했다. 조승우에게도 '손예진이 항상 계단 위에 있다고 생각하라'고 주문했다."
― "유치하네,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하는 대사를 보면 영화의 약점을 먼저 공개하는 것 같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 아닌가. 유치하다는 표현보다는 '능청맞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쑥맥 같은 주희가 코믹한 춤을 추는 장면이나 유치한 대사가 이어지다가 코믹한 분위기로 반전하는 것도 관객의 감정 흐름을 고려한 것이다."
―할리우드 감독 스카우트 대행사 브랜트 로즈 에이전시와의 계약은 어떻게 됐나.
"할리우드에서는 빨리 건너오라고 하는데 계약을 좀 느슨하게 했다. 무턱대고 건너갔다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지도 모르고. 한국 시장이 좋은데 여기서 좀 더 연출을 한 뒤 시나리오를 보고 미국 행을 고려하겠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 "클래식"은 어떤 영화
흰 비둘기, 편지, 사랑의 시구. 촌스런 대사와 설정이 가득한 '클래식'을 가슴 절절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만드는 것은 '절제'다. 고교생의 사랑은 어른들의 사랑처럼 육체적 관계로 발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 속에 절규를 담은 채 '언젠가'를 기약한다. 감정은 폭발할 것 같으나 표현되지 못하는 사랑, 그것으로 '클래식'은 잘 만든 멜로 영화로 태어났다.
'창 밖을 봐. 바람에 나뭇가지가 살며시 흔들리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귀를 기울여봐. 가슴이 뛰는 소리가 들리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널 사랑하고 있는 거야…' 이 정도가 되면 유치하며 한물간, 혹은 클래식한 사랑놀음을 그려낸 영화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곽재용 감독은 여기에 코믹한 설정과 최루성 후반부를 교묘하게 결합해 '가슴 아픈 사랑' '고왔던 첫사랑'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클래식'은 '소나기'의 주인공이 고교생이 되었을 때와 그리고 먼 훗날 그들이 서로 헤어져 아들 딸을 낳았을 때, 두 세월을 격자로 짜넣었다. 연극반 선배 상민(조인성)을 사랑하지만 단짝 친구에게 빼앗긴 소심한 지혜(손예진). 친구 대신 이메일을 대필하며 상민에 대한 사랑을 삭이려 노력 중이다.
어머니가 여행을 간 사이, 지혜는 낡은 편지함에서 60년대 엄마의 사랑을 엿보게 된다. 여름방학에 시골에 내려갔던 고교생 준하(조승우)와 주희(손예진)는 사랑에 빠지지만 공화당 의원의 딸인 주희는 준하의 단짝 태수와 집안끼리 정혼한 사이. 준하는 태수를 대신해 연애편지를 써주며 안타까워 하지만,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법. 결국 둘은 태수를 따돌리며 비밀 연애를 시작한다.
준하와 주희의 사랑을 방해하는 태수조차 너무나 착한 인물로 설정됨으로써 영화는 선악 구도를 그리지 않고도 상황의 비극성을 극대화한다. 후반부가 다소 늘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마음을 풀어놓고 본다면 실컷 웃다가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릴 만한 영화다. 30일 개봉. 12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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