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무죄에요. 아담의 새 어머니인 폴린의 머리에 난 상처는 차 사고 전에 생긴 것입니다. 또 아담이 범인이라면 왜 차에 지문을 남겨놨겠어요?" "좋아. 다른 사람 생각은?" "제 생각도 무죄에요. 우선 사망자들의 옷이 더러워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요. 또 아담이 차를 손보고 떠난 뒤 누군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산 영수증이 차에서 나왔는데, 아담이 브레이크를 고장내지 않았다는 확실한 알리바이에요." "제 생각엔 아담이 범인이에요."한 남학생의 유죄 견해에 교실이 왁자지껄해졌다. 순식간에 "확실한 증거가 뭐냐" "영수증은 어떻게 된 거냐"는 반박이 쏟아진다. 숨돌릴 틈도 없다. 6∼8학년(초6∼중2년) 학생 10여명이 말싸움하듯 토론을 벌이고 있는 이 곳은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파예트시에 있는 퍼듀대학. 이 대학 영재교육연구소(GERI)가 25년째 주말마다 운영하는 '슈퍼 새터데이'의 '범죄과학반(Forensic Science)'이다.영재성을 자랑하는 주말 교실
"아이들이 말이 아주 많죠? 모두 주제에 몰입하다 보니 쉽게 뜨거워지고 논쟁적이에요. 사실 이런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선 주위 눈치를 보며 말을 못해요. 하지만 이 곳엔 자기하고 비슷한 아이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죠." 수업을 이끈 앰버 반젤씨는 퍼듀대 4학년생(초등교육 전공). 이날 수업은 한 시나리오를 놓고 유·무죄를 추리하는 것으로 진행됐는데 지금까지 머리카락·섬유 등의 현미경 분석, DNA 검사 등을 탐구해왔다. 반젤씨는 "이 학생들 중에서 범죄수사과학자가 되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화학이나 생물학 등에 대한 흥미는 커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옆 교실 '로보틱스반'에선 5∼6학년 학생들이 레고를 맞추고 회로를 연결해 로봇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커다란 공구가방을 열어젖힌 채 아버지와 머리를 맞대거나, 교실 바닥을 가로질러 달리는 로봇을 보고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은 영재교육이라기보다 그저 재미난 취미활동에 가깝다.
로보틱스반 교사인 리처드 코들씨는 "회로 읽는 법, 조립법 등을 기본적으로 가르친 뒤 낡은 컴퓨터와 모터 등을 이용해 축구 로봇을 만들었다"며 "다음 주 팀별로 만든 로봇으로 축구경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사 경험이라곤 처음인 평범한 기술자. 자기 딸이 슈퍼 새터데이에 참여하게 돼 자기도 교사 신청을 한 뒤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GERI의 슈퍼 새터데이는 유치원생을 위한 '곤충학' '크레용 미술'부터 중학생 대상의 '웹 디자인 고급과정''역사와 할리우드'까지 30여개 반으로 구성돼 있다. 봄 가을로 9주간 토요일마다 열리는 이 프로그램에는 인디애나주뿐 아니라 주변 5개 주(일리노이, 아이오와, 오하이오, 위스콘신, 미시간)에서 3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다. 언어, 읽기, 수학 과목 중 한 과목에서 상위 10% 이내의 성적이거나 지능지수(IQ) 120 이상이면 참가할 수 있다.
학습에 대한 흥미유발이 목적
특별한 교육을 기대하는 우리 학부모들이 보면 "이게 영재교육이야?"라고 반문할 지 모른다. 30여개 반 중 대학수준의 수학, 과학을 가르치는 반은 전혀 없다. GERI는 여름방학동안 1∼3주 합숙의 서머 캠프도 운영하는데 역시 비슷하다. 다만 중학생까지 참가하는 슈퍼 새터데이엔 코들씨같은 일반인 교사가 대부분이고, 서머 캠프에는 고등학생도 참가하기 때문에 퍼듀대의 공대·의대 등 전공자가 수업을 맡는 일이 많다.
GERI의 시드니 문(퍼듀대 교수) 소장은 "우리 프로그램의 주된 목적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분야에 접하도록 하는 것, 공부에 흥미를 유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형적인 심화학습(enrichment)이다. 심화학습은 교육의 깊이보다 흥미와 관심을 추구한다. 어려운 수학·과학을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기존의 영재교육과는 다르다. 대신 창의적 시도, 재미있는 학습, 축구로봇이나 보고서 등 결과물을 통한 성취감을 중시한다.
이런 심화학습의 가치는 공부를 즐기도록 한다는 점이다. 영재들은 간혹 학교 수업을 따분하게 여겨 오히려 학습부진아로 전락하기 쉽지만, 혼자 하는 취미활동에서는 눈부신 재능을 드러낸다. 문 소장은 "영재들이 커서 범재로 머무는 것은 교육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아 공부에 흥미를 잃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천자문을 줄줄 외워 신동 소리를 들었지만 결국 지방 대학에 진학한 우리나라의 한 영재는 "학교가 너무 재미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슈퍼 새터데이의 학생들은 앞에 놓인 탐구과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눈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글·사진=웨스트 라파예트(미 인디애나주) 김희원기자 hee@hk.co.kr
■"지식 창출이 영재육성 핵심"
미 국립영재교육연구소 조지프 렌줄리(코네티컷대 교수) 소장이 제시한 3부 심화학습 모델은 슈퍼 새터데이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미국에 널리 퍼지게 된 근간이다.
3부 심화학습이란 문제의식을 일으켜 흥미와 동기를 유발하는 단계(1부), 개념을 이해하고 탐구를 위한 기초기능을 익히는 단계(2부), 학생이 선택한 주제와 방식으로 지적 결과물을 생산하는 단계(3부)로 이뤄진 교육모델.
렌줄리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기존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영재 자신이 지식과 정보를 '창출'해내는 3부 과정이다. 빨리 대학과정을 마쳐 최연소 박사학위를 따는 것보다, 지식 생산자로서 연습을 하는 것이 영재 육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영재교육은 AP(고교과정에서 대학 학점을 미리 따는 제도)로 대변되는 속진교육도 많지만 심화학습 프로그램 역시 다양하게 보급돼 있다. 시리즈 1,3회에 소개된 토마스제퍼슨 과학기술고나 일리노이 수학과학학교(IMSA)의 연구수업도 심화학습의 형태다. 올림피아드 형식의 지필고사뿐 아니라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 발표하는 각종 과학경연이 많다.
● 양국 영재교육 비교연구
어떤 가정환경, 어떤 육아 방식에서 영재가 자라나느냐는 것은 학자와 학부모의 공통 관심사다. 육아 환경이 영재성 계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년간의 영재 연구에 따르면 영재는 부모의 교육수준이 높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안정적이며, 자녀 중심적인 분위기에서 양성된다. 또 가족형태는 중산층 이상의 핵가족이 많다. 특히 미국의 경우 영재는 첫째나 외동 아이가 다수라고 조사됐다. 눈에 띄는 것은 영재의 어머니는 교육수준이 높아도 전업주부가 많다는 점. 자녀에게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느냐는 점이 영재를 키워내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뜻이다.
영재의 가정은 성취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고 자녀의 학습에 많이 관여하는 편이다. 그런데 부모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느냐가 학습 영재와 창의적 영재의 차이를 만든다. 특히 미국에 비해 대만에선 학습 영재가 만발하는 반면 창의적 영재는 고사(枯死)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시드니 문(퍼듀대), 대만의 웬추안 쉐(국립대만대양대) 교수가 양국 영재연구를 비교한 논문을 보면 대만 영재의 부모는 성적에 관심이 큰 반면 미국의 부모들은 다양한 영재프로그램에 관심을 두고 창의성을 키우도록 격려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대만에선 학과공부 이외의 재능은 무시당하고 아이들은 적성과 무관하게 공부만 강요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 영재 자녀가 전공과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도 부모의 입김이 크다. 이러한 대만 부모의 특징은 '자녀는 부모의 연장선이며 영재는 가족의 명예를 대표하는 존재' 정도로 여기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해석되는데 우리나라 부모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도 지능지수(IQ)가 높은 자녀와 창의적 자녀를 길러낸 부모의 가치관은 좀 다르다. IQ가 높은 자녀의 부모는 지식의 가치, 학업의 성취(성적, 수상 등)를 강조하고 숙제와 공부시간을 일일이 챙기는 반면 창의적 자녀의 부모는 독립심, 문화적·지적 추구, 일하는 즐거움을 강조한다는 보고들이 있다. IQ는 높지만 창의성이 떨어지는 경우 부모들이 포용적이지 않고 비판적이며 전통적 가치를 존중토록 교육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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