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27일은 인류가 제 잔혹함의 끝간 데를 확인한 날이다. 폴란드로 진격한 소련군은 이 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문을 열었다. 그들은 철조망 너머로 자신들이 목격한 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용소 안에는 거의 죽기 직전의 유대인 5,000 명이 남아있었다. 그 직전, 독일군은 거기 수용돼 있던 유대인 수만 명을 이송하거나 처형했다. 수용소의 진실이 외부로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증언을 통해 고문이나 가스실 같은 수용소의 끔찍한 진실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쟁 기간 동안 독일군 점령 지역에는 200여 개의 수용소가 있었다. 그 곳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과 수천 명의 파르티잔·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이 죽음을 맞았다. 나치 정권은 이들이 땅 위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쓰레기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들에게 '최종 해결책'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유대인 학살은 인류가 인류에게 가한 가장 끔찍하고 규모가 큰 범죄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식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수정주의 또는 부인론(否認論)이라고 불리는 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프랑스 리옹 대학 교수였던 로베르 포리송 같은 사람이 수정주의자다. 포리송에 따르면 유대인 학살의 규모는 크게 과장되었고, 어떤 수용소에도 가스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생존 유대인들의 증언 가운데 상당 부분이 과장되었거나 허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포리송은 자신의 견해 때문에 여러 차례 기소되고 신체적 테러를 당했다. 미국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그 자신이 유대인이고 부인론을 거부하면서도, 포리송이 유럽에서 겪는 박해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며 그를 옹호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고 종 석/논설위원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