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나에게 떠넘기시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최근 민주당 정대철(鄭大哲) 최고위원에게 한 말이다. 정 위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당선자의 최측근으로 여권 신주류의 핵심 인사. 그는 수시로 노 당선자를 만나고 있다. 따라서 김 대통령의 이 말은 노 당선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다.정 위원이 24일 기자에게 전한 정황은 18일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과 오찬을 함께 하는데 김 대통령이 이 말을 여러 차례 했다는 것. 정 위원은 또 "김 대통령이 노 당선자를 많이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정 위원에 따르면 김 대통령은 "나는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과의 면담 일정을 취소했지만, 노 당선자가 가와구치 외상을 만난 것은 잘한 일"이라며 "악역은 내가 하겠다"는 말도 했다.
정 위원은 "대북 특사 역시 자칫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점 등을 고려해 현 정부가 다음 정부에 넘기지 않고 지금 보내기로 결정한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김 대통령이 외교 분야 뿐아니라 현 정권에 쏠린 여러 비난과 의혹의 책임을 차기 정부에 넘기지 않고 자기가 모두 떠안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차기 정부의 원만한 출범과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단순한 협조 차원을 넘어 화살받이 역할을 할 각오까지 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발언은 17일 노 당선자가 4,000억원 대북 지원 의혹 등에 대한 '공정하고 투명한 수사' 원칙을 천명한 바로 다음 날 나온 것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김 대통령으로선 노 당선자가 이 문제에 정면 대응하는 것을 용인하고 그로 인한 정치적 논란까지 감수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1987년 대선 직전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후계자인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후보에게 "나를 밟고 가도 좋다"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김 대통령은 이미 지난 달 23일 노 당선자와의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도 "노 당선자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며 최대한의 협조를 약속했었다. 당선자측 관계자는 "국민의 정부가 실패한 정권으로 평가 받지 않으려면 결국 노무현 정부가 성공해야 한다는 점을 DJ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김 대통령이 15일 가와구치 외상 면담을 취소한 것 역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朗) 총리의 신사 참배에 대한 국내 비난 여론을 감안, 차기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의도적인 배려로 해석할 수 있다.
/박정철기자 parkj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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