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과학자 중 여성은 10.2%(2001년 1만6,385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전년에 비해 26%가 증가한 것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비율은 더 떨어진다. 한 여성과학자는 "여성이기 때문에 지원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치열한 세계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우수한 여성인력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일보는 여성과학자의 양성을 국가 과학기술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올해를 빛낼 우수 여성과학자를 소개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추천을 받아 연구과제의 학문적 의미가 크고, 발표한 논문의 질과 양이 뛰어난 여성과학자들을 소개한다.
연세대 물리학과 유경화(44) 교수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14년간 연구를 하다 2001년 연세대로 옮겼다. 한 동료 교수는 "당시 나노소자 분야의 교수를 뽑기로 하고 연구자 리스트를 뽑아보니 유 교수만한 인물이 없었다"고 말한다. 연구 외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그는 논문으로 말하는 조용한 과학자다.
유 교수는 199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단(單)전자 소자를 만들어 영하 269도에서 작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기존의 반도체 소자가 수돗물처럼 흐르는 전류를 제어하는 것이라면 단전자 소자는 물 한 방울에 해당하는 전자 하나나 10개 미만을 제어하는 것. 단전자 소자가 실용화하면 대용량 저장, 고속계산이 가능해지고 전력은 절감된다.
2001년에는 지름이 2나노미터(㎚·10억분의1m)에 불과한 DNA로 상온에서 작동하는 트랜지스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DNA의 전기적 특성은 지난 10년간 도체, 부도체, 심지어 초전도체라는 연구도 나올 정도로 논란이 심했으나 최근 반도체로 기울었다. 유 교수가 2001년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낸 논문은 세계적으로도 드물게 반도체적 성질을 명료하게 측정한 실험결과다. 더욱이 그는 DNA를 이루는 염기의 구성에 따라 반도체 특성이 구분된다는 것도 밝혀냈다. 구아닌(G)과 시토신(C)이 결합한 사슬은 전자를 방출하는 N타입, 아데닌(A)과 티민(T) 사슬은 전자를 받아들이는 P타입이라는 것이다.
물리학자인 유 교수가 생체분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0∼20㎚ 크기의 단전자 소자를 연구하며 균일하게 제작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한계를 절감한 때문이다. 0.1㎚만 크기가 달라도 소자마다 특성이 달라져 실용화는 생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왜 자연이 만들어놓은 균일한 나노 분자를 이용하지 않는가"하고 반문하기 시작했다. DNA나 단백질 같은 생체분자는 작으면서 똑 같은 크기로 '태어난다.' 자연의 질서다.
생체분자의 또 다른 매력은 전하, 산도에 따라 서로 잘 달라붙거나 떨어지는 특성이 있어 스스로 결합하는 자가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생체분자용액이 든 비이커에 잘 결합하는 금속판을 넣고 흔들어 주기만 하면 금속판 위에 스스로 가지런히 배열된다. 탄소나노튜브 등을 이용한 나노 소자는 한 개씩 만들기는 하지만 고집적 칩을 제작할 뾰족한 도리가 아직 없다. 유 교수는 "아직 실용화까진 길이 멀지만 생체분자소자를 이용하면 스스로 조립하고 문제를 스스로 고치는 자가 복구까지 가능한 새로운 개념의 칩이 가능할 것"이라며 "이런 점이 연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말한다.
유 교수는 화학 전공자와 밀착한 공동연구로 물리학과 생화학의 융합연구를 어렵지 않게 풀어나간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부터 학부 3학년생 사이에서 생화학 수업을 듣고 있다. 연세대 물리학과 졸업 후 미 일리노이주립대에서 3년만에 석·박사를 마쳤지만 생체분자 관련 논문을 이해하기 쉽지 않아서다. "학생들 사이에서 교수가…"하는 시선이 있지만 "시험을 안 치니 역시 공부를 덜 해요"라며 웃는다.
그는 앞으로 생체 나노소자를 이용한 초고감도 바이오 센서를 개발할 생각이다. 현재 1,2개 분자를 감지할 수 있는 센서는 없다. "탄소나노튜브는 분자 하나만 결합해도 전기적 특성이 크게 달라지죠. 이를 측정하면 1,2개의 암세포만 있어도 암을 진단할 수 있거든요. 생체 나노분자는 실생활에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김희원기자 hee@hk.co.kr
● 나노소자 연구현황
나노 소자를 이용한 고집적·고속정보처리 칩은 21세기 첨단기술인 나노테크놀로지(극미세기술)의 총아다. 차세대 고집적 고속 칩은 PC를 휴대폰처럼 소형화해 들고 다니게 하는 등 실생활에 많은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현실은 기가(100만)바이트급이 장벽이다. 기가급을 테라(1조)급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그만큼 소자가 작아야 한다. 문제는 나노 수준의 미시세계에선 적용되는 물리법칙이 달라 실용화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은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나노 소자에 먼저 눈을 돌렸다. 지름 수 ㎚ 튜브 모양의 탄소나노튜브는 반도체 특성을 제어하기 쉬워 각광을 받고 있다. 또 단백질, 유기분자, DNA, 신경세포 등 생체분자를 이용한 나노 소자 연구도 한창이다. 생물학적 특성상 자가조립, 자가복구가 가능할 전망. 궁극적으론 전자 하나를 제어하는 단전자 소자가 이용될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