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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국토기행](16)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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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국토기행](16)통영

입력
2003.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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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 현황위치 북쪽으로 고성군, 동쪽으로 거제시, 서쪽으로 남해시, 남쪽으로 남해 바다

면적 236.5㎢

인구 13만4,107명 4만5,354세대(어가 6,009 가구, 2만1,229명)

행정구역 1읍(산양읍) 6개 면(용남 도산 광도 욕지 한산 사량) 11동

2003년도 예산 2,130억원

특산물 굴 멸치 우렁쉥이(멍게) 장어 나전칠기 누비 전통연

명소사적 한산도 제승당 충렬사 세병관 청마문학관 남망산국제조각공원 산양관광도로 비진도해수욕장 안정사 용화사 등

"통영(統營)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 그 고장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작가 박경리는 '김약국의 딸들'(1962)에서 통영이 '일찍부터 항구는 번영하였고 주민들의 기질도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강하였다'고 했다. 1955년부터 95년까지 '충무'로 불렸다가 다시 옛 이름을 되찾은 통영은 그냥 나폴리가 아니라 물자와 예술이 넘치는 나폴리이다.

14번 국도를 타고 고성에서 통영으로 들어서니 쪽빛 하늘과 바다가 어우러진 풍광이 눈부셨다. 그러나 '나폴리'라는 명성은 통영 운하 위에 걸린 통영대교를 건너 미륵도를 일주하는 산양도로를 휘 돌아본 뒤에야 실감이 났다. 굽이굽이 해안선마다 자리잡은 포구와 양식장 앞의 푸른 바다 위에 150개의 섬이 갈매기떼와 함께 흩어져 있다.

통영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3도 수군의 본영인 통제영(統制營)에서 나왔다. 조선시대 해군 총본영으로 설계된 이후 전국 각지의 물산과 사람이 모여 들어 통영의 독특한 문화와 기풍을 일구었다. 일제는 통제영과 4대문을 헐어내고 인구 2만∼3만의 근대적 도시를 설계했다. 일제가 입힌 그 옷도 이제는 너무 작을 정도로 통영은 훌쩍 커버렸다. 도심의 2차선 중앙도로는 빽빽하게 늘어선 차들로 심한 동맥경화를 앓고 있다.

통영 가서 돈 자랑 말라

낙엽을 갈퀴로 긁듯 바다에서 돈을 쓸어 담았다는 통영의 황금 바다는 숱한 문인과 음악가, 미술가를 길러냈다. "경기가 어려울 때도 통영만은 흥청거렸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가장 큰 호황을 누리던 곳" "IMF도 비켜간 곳"…. '통영 가서 돈 자랑 하지 말고 양반 행세 하지 말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그러나 이제 심장부인 서호시장과 중앙시장에서도 활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한숨 소리가 들린다. 식은 숯덩이를 화로 몇 개에 담아 칼바람을 막고 서서 좌판을 벌인 아주머니들은 "이제는 벼랑",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진다"고 푸념했다. 시청 직원은 "1998년 한일 어업협정 개정 이후 배는 줄고 실업자가 늘었다"며 "고기는 안 잡히고 생계가 막막하다"고 했다.

전국 굴의 70%가 모인다는 굴 경매장. 하루에 10㎏들이 8,000 상자가 거래되는 이곳에도 근심이 가득하다. "자꾸만 쇠퇴해 갑니다. 미국과 일본이 일시적으로 굴 수입을 중단한 타격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환경오염으로 우렁쉥이 생산은 줄고, 원양어업은 출어를 못하고, 어자원은 고갈되고…." 성삼만(49) 굴수협 판매유통과장의 걱정이 길다. 송건태(50)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은 "연근해는 치어까지 잡아 고기 씨가 말라가고 있고 중국 수산물이 싼 값에 수입돼 청정 해역인 통영 산으로 둔갑해 팔리고 있다"고 개탄했다.

12대 민선 시장을 지낸 수필가 고동주(66)씨도 "한일어업협정 개정 이후 어장이 줄어 드는 바람에 통영 시민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부연했다. 어선 감축과 폐선, 용도 변경 등으로 포구를 가득 메웠던 배들은 하나 둘 줄어 들었다. 1997년 6,440척에 달했던 배가 현재 5,814척으로 줄었고 2,701억원(96년)에 달하던 수산물 위탁판매고는 1,421억원으로 반감했다. 굴을 제외한 활어 우렁쉥이 붕장어 등의 위탁고도 뚜렷이 줄고 있다.

통영의 미래

통영 사람들의 걱정어린 말에서는 감춰진 희망도 엿보였다. 어업 전진기지이자 수산업의 보고로 누렸던 명성을 되찾자는 꿈 말고도 여러 비책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2005년 완공되는 통영―진주―대전 고속도로, 1년에 50억원씩 투자해 벌일 4차선 중앙도로 확장 사업, 1997년 공사가 시작돼 2003년에 끝날 예정인 86만평 부지의 안정공단 조성 사업 등이 한창이다. 덕분에 10년 동안 줄어 온 인구가 최근 증가세로 돌아섰다.

통영시는 '명품도시 건설'을 기치로 내세우고 독특한 관광·문화·수산상품 개발에 고심하고 있다. "사량도 노대도 장사도 등 특색 있는 다섯 섬을 묶어 관광특구로 개발하면 95년 이후 30% 증가한 관광 수입을 더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고 전 시장은 기대했다. 93년 117만명이던 관광객은 지난해 260만 130명으로 배 이상 늘었다.

김일룡(54) 향토역사관장은 "구슬이 서말인데 꿰지 못해 보배가 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고 비유했다. 그는 "대표적 유적지인 통제영을 복원하면 통영의 이미지는 달라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통영시는 546억원을 들여 통제영의 심장부인 세병관 주변 일대 1만2,000평을 개발할 예정이다. 김 관장은 "예전엔 수려한 경관만 앞세웠는데 이제 통제영의 12공방을 복원해 수공업 과정을 재현하고 청마(靑馬·유치환) 문학관, 통영국제음악제 등 테마 관광 위주로 개발하면 통영의 앞날은 밝다"고 덧붙였다.

송건태 사무국장도 "성장 잠재력은 크다"고 맞장구를 쳤다. "바다 목장 사업을 활성화,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가면 타개책이 될 수 있습니다. 통영이 해양성의 따뜻한 기후인 탓에 최근 동계 훈련지로 각광받고 있는 것도 고무적입니다."

그러나 개발과 테마관광도시의 꿈은 아직 현실이 아니다. "물가 비싸지, 미륵도 마리나 콘도 빼고는 묵을 데 없지…. 사람들이 인근 거제로 가서 논다 아입니까." 한 택시기사는 늘어나는 관광객이 정작 돈은 거제에서 쓴다고 투덜댔다. 관광 인프라 구축이 환경보존을 무시하면서까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 미륵도 관광특구 케이블카 설치에 대한 시민들의 찬반 논란은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통영의 꿈은 또 있다. 독일 권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지난해 3만2,000명의 청중을 동원할 정도로 성황을 이룬 통영 국제음악제를 보도하면서 '아시아의 잘츠부르크'라는 제목을 달았다. 올해는 3월25일부터 4월2일까지 '꿈'이라는 주제로 열리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세계적 연주자들이 방문할 예정이다.

"꿈이라는 주제는 윤이상의 오페라 제목이자 이곳을 아시아의 잘츠부르크로 만들겠다는 꿈을 담은 것입니다." 김승근(35) 국제음악제 사무국장은 "통영만한 음악 도시를 아시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며 "음악제 단일행사 예산만 시 예산 1%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통영시는 8억원을 지원하는 등 윤이상의 고향을 그리그의 고향 베르겐(노르웨이)이나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오스트리아) 같은 도시로 키워나갈 계획이다.

통영대교와 나란히 걸린 충무교 밑 운하로 고기잡이 배들이 오갔다. 항구로 돌아 오다가 핸드폰으로 백건우 연주회 표를 예매했다는 욕지도의 60대 선원 말이 떠올랐다. 저녁이 되자 통영대교는 196개의 푸른 빛 등에 불이 들어왔다. 150개의 섬만큼이나 많을 통영 사람들의 꿈과 걱정이 반짝이는 듯했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사진 왕태석기자

● 한산대첩제전 사무국장 최정규씨

윤이상 박경리 김춘수 유치환 김상옥 유치진 전혁림 등 문화 전방위에 걸쳐 걸출한 선각자를 배출한 곳. 발 가는 데마다 세병관 충렬사 등 유적지가 이어지고 7종의 중요 무형문화재를 보유한 곳. 어디로 눈을 돌려도 쪽빛 맑은 바다가 밀려드는 곳. 작가 박경리가 '조촐한 어항'으로 묘사했던 통영은 어느덧 굴지의 문화·관광 도시로 성장했다.

"통영오광대 남해안별신굿 승전무 나전장 소목장 등 중요 무형문화재가 7종, 보물과 사적 등 문화재가 49점이나 있습니다. 이렇게 문화재가 많은 도시는 없지요. 김춘수 김상옥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배출했고 동서양 음악을 아우른 윤이상도 통영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런 음악은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

시집 '통영바다' 등을 낸 시인이기도 한 최정규(52·사진) 한산대첩기념제전 사무국장의 말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고 생존력이 강해서 배타적이지 않고, 먹을 거리는 바다에 지천이니 다 몰려들 수밖에요. 땅 몇 평하고 너른 바다의 어장하고 비교가 됩니까. 그만큼 통이 커지는 거죠."

사철 온화한 날씨도 통영의 복이다. "모피 코트를 입을 날이 거의 없고 눈 내리는 날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한 고장이어서 명미(明媚)한 풍광이 예술적 정서를 일깨웠다"는 얘기다.

그는 문화예술 도시로서의 통영의 뿌리를 임진왜란 이후 삼도 수군 통제영 설치(1604년)로 잡는다. "충청 전라 경상 세 군데의 수군이 모인 3만6,000명, 거기에 548척의 병선이 있던 곳입니다. 삼도 수군이 자급자족하느라 조선업과 어업이 함께 발달했고, 물자를 담당하던 12공방에서는 활 부채 등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발전했죠. 통제영에서 '취고수청'(吹鼓手廳)이라고 악사를 길러낸 관청을 두었을 정도로 일찌감치 예술도 활짝 꽃피었습니다. "

군사도시로 출발, 어업기술과 문화예술의 요람으로 커왔다는 뜻이다. 개항 이후에는 서구 문물이 밀려드는 등 동서 문물의 활발한 교류로 경제적으로 번영을 구가했다. "일본과 가깝다 보니 근대적 어구와 어법(漁法) 등을 일찍 들여왔죠. 1910년대에는 인구가 3만명 미만이었는데도 세무서가 있었을 만큼 물적 교류와 상행위가 성했던 곳입니다. "

개화기 이후 통영 사람들은 풍요로운 바다에서 건져 올린 재화로 숱한 인재를 도쿄(東京)와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맑은 날에는 미륵산(460m) 정상에 서면 대마도가 보인다고 그는 덧붙였다.

자연 조건과 역사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오늘날의 통영을 키운 것은 억센 통영 어머니들이라고 최 시인은 예찬했다. '억척같이 살아온 포구의 여인들'이 '잠수질에 선술집 해도/자식은 판사 변호사로/국밥집 구멍가게 꾸려서는/시인 소설가와 연극인 키워'('강구안 연꽃') 낸 것이라고.

/이종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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