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메뚜기떼가 훑고 간 자리 같군요."24일 서울 강북구 우이동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선생의 고택 '소원(素園)'을 찾은 민족문화연구소 김용삼(金容三) 운영위원장은 허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생가가 곧 헐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달려왔지만 마당은 각종 공사자재와 헌종이뭉치로 엉망이 돼있고 폐품 수집상들만 곳곳에 나뒹구는 헌책뭉치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김씨는 "집은 그렇다 치더라도 남아있던 각종 자료까지 이렇게 망실되도록 방치해서야 되겠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무법천지처럼 유품 싹쓸이
대지 462평에 건평 56평의 단층 한옥인 소원은 육당이 1941년부터 52년까지 거처했던 곳. 57년 육당이 타계한 후 후손들이 관리해왔으나 지난해 말 육당의 큰 아들이 숨지면서 D건설사에 매각됐고 지난 10일 서울시문화재 지정대상에서 제외됐다. 건설사측은 3월 초 건물을 철거하고 이 자리에 빌라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 같은 소식이 인터넷 매체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최근 고서적과 폐품수집상 등이 몰려들어 육당의 유품을 마구 수거해가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이웃에 사는 김모(51)씨는 "밤이면 장정들이 집안에서 사과상자에 온갖 책을 가득 담아가고 심지어는 트럭을 이용해 물건을 나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곳을 관리하며 50여년간 살아왔다는 유모(60)씨도 "최근들어 엄청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곤했다"며 "대학교나 사회단체에서 자료수집 차원에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전문 '꾼'들은 가치있는 물건만을 골라 닥치는 대로 싹쓸이해갔다"고 털어놨다.
서울시는 수수방관
소원에는 육당이 생전에 받은 편지, 일본황실 관련 사진첩, 프랑스에서 보낸 신문과 각종 육당 관련 고서적 등 문학사적 가치가 있는 물품들이 보관돼 있었지만 며칠만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관할 강북구청에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여러 차례 건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은 육당이 조선 청년들에게 태평양전쟁 참전을 독려하는 등 친일행각을 했던 곳이라 지정대상에서 제외했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육당 후손들이 소원을 매각하면서 집안에 남은 자료들을 정리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문화재 관리 철저해야
문화재 보호 단체들은 서울시의 이번 결정과 관리 소홀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비록 육당의 친일행각이 문제라도 그가 국문학사에서 차지한 위상을 고려한다면 역사적 자료로서 보존할 가치는 충분하다는 것. 또 친일행적과 관련된 유적이기 때문에 문화재가 아니라는 논리라면 서울시청과 한국은행 건물부터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權寧珉)교수는 "소원이 친일의 현장이라면 오히려 아픈 과거를 간직한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해야 한다"며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문학사적으로 의미있는 건물을 철거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국 문화유산정책연구소 황평우(黃平雨) 소장도 "소원에서 각종 자료들을 챙겨간 사람들 역시 하루빨리 자료를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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