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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장편소설 "섬, 나는 세상끝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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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장편소설 "섬, 나는 세상끝을 산다"

입력
2003.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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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40)씨가 장편소설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창작과비평사 발행)를 냈다. 장편이라지만 형식은 연작이다. 외진 섬에서 홀로 사는 화자가 들려주는 열두 가지 이야기가 한데 묶였다.한씨는 수년 전 전남 여수의 거문도에서 홀로 살았다. '섬, 나는…'은 이때의 생활을 글로 옮겼다. 삶의 체험에서 소설을 길어 올리는 것은 한씨 작품에서 반드시 짚이는 특성이다. 도회적 감수성과 내면 묘사가 주류인 최근의 한국 문학에서 그의 글쓰기는 희귀하고 이채롭게 여겨져 왔다.

그런 한창훈씨가 새로 펴낸 소설은 질박한 입말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되 서정적이다. 사람들은 때로 오랜 친구나 가족 대신 낯선 땅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에게 속 얘기를 훌훌 털어놓는다. '섬, 나는…'에서 화자가 자리잡은 바닷가의 작은 집에 들러 가는 사람들의 사연에는 훈훈한 정과 쓸쓸한 한숨과 안타까운 눈물이 섞여 있다. "이 소설은 살갗을 트게 하고, 침묵하게 하고, 응시하게 하고, 텅 비우게 하고, 옷을 벗게 하고, 춤추게 하고 끝내는 영혼의 유전인자까지 뒤흔들어 놓는, 적막과 죽음에 관한 보고서"라는 작가의 말이 꼭 그대로다.

첫 이야기 '새'에서 도시의 여자는 바다로 찾아와 마음에 맺힌 사랑 얘기를 털어 놓는다.매일 전화를 걸고 만날 때마다 선물을 주고 무슨 일이든 도와주던 남자는 마음을 열지 않는 여자에게 지쳤다. 남자가 떠나버린 뒤에야 여자는 깊은 사랑을 깨달았다. 드물지 않은 얘기여서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담을 법하다. 작가는 적잖이 청승맞아 보이는 사랑의 한탄을 소설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오히려 화자의 마음이 온갖 사연을 품어 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함을 알려준다. 이야기 하나하나를 좇다 보면 화자는 '바다'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론가 류보선씨의 말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연,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다"이다.

'어떤 여인네, 수(琇)'에서 화자는 활달한 이웃 아낙네가 어렸을 적 뒷집에 살던 아이였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장난을 치고 쫓기다가 잡힐 만하자 무작정 고쟁이를 내리고 오줌을 누던 아이였다. 따뜻한 옛 기억이 떠올라 화자는 웃고 만다. 그러면서도 모르는 척 "내일도 밭에 오시나요"라고 묻는다. 돌아서는 여인네의 흰 단화의 맑은 소리가 듣기에 좋다.

역시 한창훈씨에게는 바다가 그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이야기다. '무적(霧笛)'에서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능적 바다를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그것은 거친 뱃사람 출신인 작가가 제몸 같은 바다를 얼마나 육감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는가를 한눈에 보여준다. 바다 혹은 자연을 의식의 경계를 넘어서서 신성한 존재로 바라보고 만진다는 점에서 그의 소설은 낯설다. "이곳은 안개의 고향. 광활한 안개무리의 본적. 욕망의 장소. 저 꿈틀대는 움직임의 본처(本處). 부드러운 물결은 옷 속을 파고들어 내 살을 매만진다. 아, 바다처럼 길고 낮고 무겁게 한숨이나 내쉬면 되는 거였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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